[이순영의 논술 개런티] 영화 ‘프랑켄슈타인’이 주는 실존주의적 메시지
이순영 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25.11.21 09:00
  •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프랑켄슈타인>은 2025년 11월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됐다. 이 작품의 원작은 세계 최초 SF 공포물로 알려진 메리 셀리의 동명의 소설이다. 실존주의 철학이 자리 잡기도 전에 출판돼 처음에는 실존주의 문학으로 분류되지 않았다. 하지만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 의식 때문에 실존주의의 입장에서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해낸 ‘생명체’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진다. 그에게 있어 세상은 결코 아름답거나 따뜻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조리한 것들로 가득 찬 곳이었다. 이에 생명체는 절망하고 분노하지만 결국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고, 결국엔 ‘살기’를 선택한다는 점에서 실존주의 철학을 완벽하게 담아내고 있다. 더욱이 델 토로가 각색한 영화는 더욱더 철저하게 델 토로 스타일의 실존주의 예술로 재창조됐다.

    ◇ 숙명적 절름발이 ‘아버지’와 ‘아들’

    영화 속 빅터는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원작과 달리, 의사인 아버지로부터 학대받고 성장하는 것으로 변형된다. 그는 의사인 아버지로부터 의학 지식을 외울 것을 강요당하고 기대에 못 미칠 시 체벌을 받는다. 이러한 성장 과정으로 인해 그는 주변의 모든 것, 모든 사람을 통제하려고 든다. 그러다가 마침내 신의 영역에 도전하며 죽은 시체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연구를 진행한다. 사형수와 죽은 병사들의 신체 부위를 봉합하고 림프계에 전기를 공급해 불멸의 생명체를 만든다.

    그러나 빅터가 자신의 프로젝트를 성공해내는 데에만 급급했지만, 그 이후에 대해서 그 어떠한 계획도 없는 상태였다. 이건 큰 문제가 됐다. 광기와 열정의 결실은 비극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가 만들어 낸 창조물은 지능적으로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생명체가 언어를 가르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빅터’ 이외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빅터는 채찍질을 한다. 생명에 대한 그 어떤 존엄도 존중도 없이 그저 ‘사물’로서 대했다. 여기서 생명을 준 자와 생명을 받은 자 사이의 기대와 실망, 긴장과 갈등 그리고 고통이 파생됐다. 

    성숙하지 못한 빅터에게 흉측한 몰골을 한 생명체는 마치 괴물 같았고 커다란 체구에 상응하는 괴력은 공포로 다가왔다. 결국 빅터는 자신의 성취가 부자연스럽고 공허하다고 느끼며 연구 시설과 함께 생명체를 파괴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 델 토로 감독은 프랑켄슈타인 메이킹 필름인 <해부학 수업>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자식과 그에 실망한 아들 관계에서 비롯된 인간 내면의 균열을 다루고 싶었다”라고 밝힌다. 

    어쩔 수 없이 세상에 기투됐고, 역시나 같은 방식으로 빅터에게 버려진 생명체는 외형뿐 아니라 내면까지도 조각난 채 세상의 냉대 속에 철저히 소외되고 고립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체는 사랑과 인정, 그리고 존중을 갈망한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절망과 좌절, 원한이었다. 그는 그렇게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왔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던 중 생명체는 숲속 오두막집에 몰래 숨어 들어가 그들 가족과 함께 생활한다. 그리고 벽 틈에 난 구멍으로 언어를 터득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오두막집에 사는 가족들을 돕는데, 가족들은 자취도 없이 뗄감을 가져다 놓고 간 그를 ‘숲의 정령’이라 여긴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들은 자신들이 키우던 양을 해친 늑대를 잡으러 집을 떠나고 노인이 혼자 남게 된다. 앞을 보지 못하는 노인 앞에 나타나도 괜찮다고 판단한 생명체는 멀리서 바라만 보던 인상 세상에 들어선다. 외모에 대한 편견이 없는 노인에게 그는 좋은 사람이자 친구였다.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한 생명체는 자기와 함께할 동반자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 빅터를 찾아간다. 그에게 있어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자 행복이 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 실존주의를 품은 프랑켄슈타인

     

    생명체는 숲에서 늑대가 양을 공격하고 또 사냥꾼이 늑대를 공격하는 것을 보고는 그들 사이에 그 어떠한 미움의 감정이 없더라도 폭력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터득한 그는 ‘어떤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사냥당하고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부조리를 자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 또한 생김새 사람들로부터 공격받아야 하는 존재로 세상에 나와, 자신을 위한 자리는 세상에 없다는 것을 인지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동반자를 원한 것이다. 같은 처지의 존재들이 연민을 가지며 서로를 채워주고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빅터는 이를 거절한다. 심지어 그는 생명체를 없애고자 다이너마이트를 생명체에게 안긴다. 자신에게 생명을 준 자가 그것을 도로 빼앗으려고 했지만, 생명체는 이를 받아들인다. 원치 않는 생명을 받았으니 이를 고스란히 돌려준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불멸의 생명체는 죽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부상입고 죽음 앞에 선 것은 빅터였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생명체에게 사과하며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부탁한다. 또한 아버지로서 “마음이 내킨다면 스스로를 용서하고 존재를 받아들이라”라고 아버지로서 조언한다. 생명체는 살아있는 동안 세상으로부터 흔쾌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고, 그리고 그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을 것임을 수용하고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살아가라는 뜻이었다. 빅터는 이 말을 유산처럼 생명체에게 남긴다. 

    그리고 빅터는 생명체를 자신이 낳은 ‘아들’로 인정하고 그를 ‘아들’이라 부른다. 생명체가 ‘프랑켄슈타인’으로 태어난 순간이었다. 그러면서 빅터는 생명체에게 자신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한번만 불러줄 것을 부탁한다. 아버지가 준 이름이지만 이름뿐인 아무 의미도 없었던 ‘실재’이기만 했던 이름이 아들에게 불러지면서 의미를 형성하기를 원했다. 그렇게 관계 속에서 가치 있는 존재로 인식된 ‘실존’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처음 생명체에게 세상에 전부였던 것 그 이름을 통해 자신도 ‘실재’에서 ‘실존’으로 생을 마감하고자 한다. 생명체는 ‘빅터’라며 그의 이름을 불러주며 용서한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괴물이 아닌 인간으로 남게 된다. 

    이 대목은 실존주의 문학으로 불리는 김춘수의 ‘꽃’을 떠올리게 한다.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존재들이 빛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꽃이 되는 신비와 연결이 된다.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존재다. 인간 소외 문제도 한 인간이 타인에게 유의미한 존재가 되는 것에서부터 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영화 프랑켄슈타인은 이러한 것들을 현대인에게 또 한 번 꺼내 보여준 것이다.

    ◇ 부서진 채로 살아가리라

    고통스럽게 사는 것 그리고 그것이 끊을 수 없는 불멸의 순환 속에 이뤄지고 있다면 이것은 저주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삶을 부여받은 생명체는 지평선 위에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며 빛과 함께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인다. 이때 스크린엔 "그리하여 마음은 부서질 것이나 부서진 채로 살아가리라." 이 문구가 마침표처럼 찍힌다. 이는 원작 작가 메리 셀리가 제네바에 있는 별장에서 이야기를 만들고 나눴을 때 함께 있었던 바이런 경의 말이다. 이는 작품의 주제를 함의 있으면서 실존주의 철학의 핵심적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작품 피날레를 장식한 의도는 델 토로 감독의 작품이 단순히 SF 공포물로만 취급되는 것을 거부하고 실존주의를 예술임을 선언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라고 했다. 세상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곳이기에 인간은 그 속에서 고통과 절망을 경험하며 완벽한 행복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에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스스로 삶의 본질을 찾아내는 프랑켄슈타인은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을 완벽하게 설명해 낸다. 

    완벽한 신화만이 양지에 설 수 있는 사회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왜 나는 여기에 있고, 세상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축복이 될 수 없다. 그런 속에 델 토로 감독은 과감히 우리 인생은 '불완전한 존재를 사랑하고 그런 불완전함까지 용서하는 것'이라는 하나의 관점을 제시한다. 그로써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 그리고 인간됨에 대해 새롭게 접근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세상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빅터가 창조한 생명체를 괴물로 표현하지 않은 것은 필자의 의지다. 그가 괴물이 된 건 그의 삶의 결과가 아니라 그가 우연히 받은 삶의 조건이었고 그로 인해 그는 충분히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괴물은 오히려 그를 괴물로 부르고 괴물로 대하고 괴물로 만든 사람들이지 않을까? 생명체를 ‘괴물’이 아닌 ‘아들’로 받아들인 빅터가 마침내 괴물이 아닌 인간이 될 수 있는 상호성은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되어줄 것이다. 


    ◇ 생각해 볼 문제 

    1, 실존주의에 대해 설명하시오.

    2. 영화 <프랑켄슈타인>이 실존주의 작품이라 분석할 수 있는 이유를 서술하시오.

    3. 빅터가 생명체를 만드는 데에만 급급한 나머지 그 이후의 계획을 세우지 않아서 발생한 문제점을 쓰고, 만약 내가 빅터였다면 어떤 계획을 세웠을지 서술하시오. 

    4, 빅터가 죽기전 생명체에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달라고 한 이유를 쓰시오.

    6. 작품 속에서 괴물은 누구이며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서술하시오.

    7. ‘괴물’이 아닌 ‘인간’으로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8. 내가 받아들여야 할 삶에 대해 쓰고, 이것에 대해 어떠한 의미를 부여할 지에 대해서도 서술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