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인의 커리業] 속도의 시대, 천착(穿鑿)의 역설
서동인 교육학 박사
기사입력 2025.06.09 09:00
  • “빠르게, 더 빠르게.” 지금 이 시대는 속도에 중독되어 있다.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고, 신제품은 몇 달을 넘기지 못한 채 교체된다. 인공지능은 우리의 생각보다 빠르게 인간의 일자리를 잠식하고 있고, 모든 플랫폼은 사용자들의 관심을 3초 안에 붙잡기 위해 최적화되고 있다.

    이른바 ‘속도의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에 청년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단연코 ‘적응력’이다. 변화하는 기술과 트렌드에 얼마나 빠르게 반응할 수 있는가, 얼마나 빠르게 배우고, 얼마나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가가 경쟁력을 좌우한다. 취업 시장에서도 이른바 ‘학습 민첩성(learning agility)’을 갖춘 인재를 선호한다. 변화에 유연하고, 적응 속도가 빠르며, 학습 곡선을 짧게 만드는 능력이 요구되는 시대인 것이다. 하지만 속도에만 몰두하다 보면, 잃게 되는 것이 있다. 바로 '깊이'이다.

    ◇ 천착(穿鑿), 깊이 파고들 줄 아는 힘

    ‘천착’이라는 말은 사전적으로 ‘어떤 일에 깊이 파고들어 연구하거나 생각함’을 의미한다. 뚫을 ‘천(穿)’, 구멍을 뚫을 ‘착(鑿)’이라는 한자에서 알 수 있듯, 천착은 단순한 관심을 넘어서 지속적인 탐구와 사유를 뜻한다. 학문적으로도 천착은 ‘어떤 주제에 대해 비판적이고 일관된 관심을 유지하며 지식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으로 설명된다.

    천착이라는 단어는 교육의 본질을 되새기게 한다. 교육학에서는 특정 주제나 질문에 대해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사유하고 성찰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학생들에게 의미 있는 배움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결국 천착이 필요하다.

    천착은 단순히 ‘오래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만의 관점으로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반복적으로 숙고하며, 다층적인 이해와 연결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결국 한 사람의 언어, 직관, 직업적 정체성까지 바꾸어 놓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처럼 삶에 '천착할 수 있는 질문', 곧 ‘평생의 화두’를 갖는 것이다. 화두는 종교나 철학의 용어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실 우리 각자가 일생을 통해 붙들 수 있는 질문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배우는가?”, “사람과 사회는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가?”, “나는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가?”이처럼 삶을 관통하는 질문 하나가 있을 때, 특히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중심을 가질 수 있다.

    ◇ 천착이 어려운 이유

    1) 자극과 정보의 과잉

    지금 아이들은 ‘관심 경제(attention economy)’의 중심에 놓여 있다. 스마트폰, SNS 등 빠르게 바뀌는 트렌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쏟아낸다. 예전에는 1시간에 가까운 프로그램을  TV에서 시청했는데 유튜브가 나오면서 10분으로 줄어들고 그나마 이것도 길다고 해서 1분 단위의 쇼츠나 릴스로 유행이 바뀌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하나에 오래 집중하기보다는 계속해서 다른 것을 시도하고, 더 자극적인 것을 찾고 있다.

    해외 연구에 따르면 2003년에는 한 화면에 평균 2분 30초 정도 유지되던 집중력이, 2012년에는 75초, 2020년에는 47초로 감소했다고 한다. 인간의 뇌는 지루함을 느끼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자극을 찾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이것도 재밌고, 저것도 궁금해”하며 여러 가지를 동시에 생각하다 보면 결국 어떤 것도 오래 붙들지 못하게 된다.

    2) 시간과 공간의 무공백

    우리나라 대부분 학생은 하루가 촘촘하게 계획되어 있다. 학원, 과외, 숙제, 자격증 준비 등으로 인해 여유가 거의 없다. 천착을 하려면 충분히 몰입하고 경험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여백이 필요한데, 지금은 그런 여백이 허락되지 않는다.

    3)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비교

    요즘 아이들은 실패에 매우 민감하다. 동시에 무언가에 몰입하는 데 주저한다. 천착이라는 행위 자체가 너무 큰 ‘비용’을 요구하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매몰비용(sunk cost)’처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곧 ‘잘못 걸리면 손해 본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무언가에 깊이 몰두한다는 것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 아이들에게는 이러한 투자가 ‘되돌릴 수 없는 리스크’처럼 느껴진다.

    “이거 하다가 나중에 쓸모없으면 어떡하지?”, “이걸로 대학 못 가면 내 시간 다 낭비 아냐?”

    결국 아이들은 더 안전한 길, 더 검증된 선택만 하려 한다. 문제는 이러한 선택의 결과로 모두가 비슷한 생각에 따라 움직이게 되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다는 것이다.

    ◇ 몰입이 만들어내는 속도

    속도와 깊이는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다. 속도는 효율성을, 깊이는 지속가능성을 만든다. 특정 분야에 깊이 몰입하고, 자기만의 화두를 만들어낸 사람은 오히려 더 빠른 길을 걷는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판단이 빨라지고, 방향성이 선명해지며,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 모 대기업의 AI 연구원으로 일하는 한 후배는 대학 시절 내내 '딥러닝의 윤리적 한계'라는 주제에 천착했다. 그가 대학원에 진학하고, 연구소에 입사하고, 기업의 인공지능 윤리 가이드라인을 설계하는 과정은 일관되고도 빠르게 전개되었다. 그는 말한다.

    “한 가지 화두를 가지고 오래 생각했던 경험이 제 커리어의 핵심 역량이 되었어요.”

    ◇ 속도에 휘둘리지 않고, 방향을 선점하기

    지금 우리는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끊임없이 달리는 러닝머신 위에 올라타 있다. 그 위에서 방향 없이 달리다 보면, 결국 탈진하게 된다. 그렇기에 가끔은 걸음을 멈추고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어떤 주제에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내 삶을 관통하는 질문은 무엇인가?”, 

    “나는 하루에 얼마나 무엇에 몰입하고 있는가?”

    속도의 시대에는 빠르게 움직이는 것만큼이나, 깊게 멈춰 서는 용기도 필요하다. 천착의 시간은 결코 시대에 뒤처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천착이 나만의 속도를 만들고, 평생의 화두가 내 삶의 방향을 선명하게 해준다.

    속도를 쫓는 것이 아니라, 속도 위에 나만의 방향을 세우는 작업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 그 방향이 곧, 커리업(Career + Up)의 첫걸음이 된다. 삶을 관통하는 나만의 핵심 질문은 시간이 지나면서 곁가지를 치고, 뻗어나가면서 다른 사람과는 다른 고유한 가치를 만들어 낼 것이다. 그 질문으로부터 파생되는 곁가지 끝에 열리는 열매들은, 누구와도 다른 나만의 결실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