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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 픽쳐스 에니메이션이 제작한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미국 넷플릭스 영화 탑 10 차트에서 3주차 2위를 차지하면서 명실상부 2025년 넷플릭스의 최고의 히트작이 됐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악귀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는 퇴마사 케이팝 걸그룹의 이야기다. 이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그들이 지닌 검을 써 악귀들을 퇴치한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악귀들은 저승사자들로 구성된 보이밴드 ‘사자 보이즈’를 데뷔시킨다. 사람들은 이러한 내막도 모른 채 ‘사자 보이즈’에게 빠져든다.
이 같은 스토리 라인으로 전개되며 사운드트랙은 극 중에서 자연스럽게 뮤직비디오처럼 흘러나오는데, 이마저 대박이 나면서 케이팝의 세계적인 위상을 또 한 번 확인시켜주고 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사운드트랙은 7월 19일 자 빌보드 200 차트에서 오픈 3주만에 2위라는 최고의 기록을 세웠다. 2020년 이후 빌보드에서 1위와 2위를 차지한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은 ‘엔칸토’ (2022년 9주간 1위), ‘바비’ (2023년에 1위), ‘위키드’ (2024년 2위 기록)이다. 현재 ‘오징어게임’이 미국 드라마 탑10 중 1, 2위를 오가고 있는 것을 보면 한류가 일으킨 세계적 문화 현상은 우리가 체감하고 있는 그 이상이다.
케이팝 가수들의 콘서트는 몇만 명이 넘는 대형 공연장 매진을 기록하고,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 시상식에 참가해 상을 수상하는 등의 행보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시작되어 왔다.
미국 제너럴 밀스(General Mills)사는 투모로우 바이 투게더(Tomorrow X Together 이하 투바투) 사진을 담은 시리얼을 출시하기도 했으며, 음반을 판매하는 서점 혹은 마트에서 대다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것들을 접하면서 한때 한국에서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한국어 이외에도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하자는 주장이 일었던 적이 떠오른다. 영어가 영미권 국가들만의 언어가 아닌 세계의 언어고, 영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곧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는 일이라는 이유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경제특구과 국제자유도시 등 일부 지역에서만이라도 시범적으로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해 사용하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고유의 언어를 가지고 있고 이로 모든 것들을 해나갈 수 있는데 굳이 영어를 공용화할 필요가 없어 무산이 되긴 했지만, 이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지니고 있다.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곧 우리의 생각과 의식이며 철학이자 사상 자체이기 때문에 우리를 구성하는 정체성 확립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민족 교육의 구심점은 언어 교육이라고 한다. 해외에 있는 많은 한국 학교에서 한글 교육을 중점적으로 하는 것은 비단 한민족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길러주며 이를 정신적 삶의 기둥으로 삼고 살아나가도록 하는 목적이 내포돼있는 것이다.
탈무드에 보면 히브리 민족의 지도자 모세는 어릴 때 친모를 떠나 이집트로 입양돼 이집트 왕자로 자랐다. 당시 이집트 파라오가 히브리 영아를 학살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모세의 친모는 자식을 살리기 위해 그를 강에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를 키웠던 유모가 다름 아닌 친모였다고 한다.
파라오의 딸이 강물에서 목욕하던 중 떠내려오던 모세를 건져 이집트의 왕실로 데리고 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젖을 물릴 유모가 필요하자 히브리인을 데려다가 썼는데 그게 바로 모세의 친모였던 것이다.
이 여인은 히브리 지도를 가슴에 그려놓고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그만큼 민족과 언어 교육에 힘썼다고 전해진다. 모세가 타국의 왕자로 부족함 없이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부귀권력을 버리고 핍박받는 히브리인들의 민족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그리고 4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척박한 광야에서 자민족을 지켜내며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착실히 만들어 나갔다. 이렇듯 모세가 모국의 민족적 영웅이 된 것도 이러한 어머니의 교육과 무관하지 않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대인 부모들에게 자녀교육의 롤모델로 회자되고 있다. 이 일화만 보더라도 인간이 정체성 교육은 엄청난 노력과 희생이 요구되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말고 해야 하는 중요한 일임을 알 수 있다.
만약 요게벳이 이집트의 왕자로 자라고 있는 모세에게 “너만 잘 살면 됐어. 다른 힘든 것들 생각지 말고 너만 생각해.”라고 가르쳤다면 이후 2000년 넘게 이어질 유대인들의 역사는 있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의 상징적 군주인 다윗보다도 모세를 더 위대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는 마치 우리 민족이 일제 식민지 탄압 속에서도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고 계승하고자 노력했던 것과 비슷하다.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이 극심했던 시절에는 한글을 사용해 글을 썼다는 죄목으로 수용소에 갇혀 죽기도 했다. 독립운동을 해서가 아니라 단지 글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당장에 이익이 되고 편한 것을 좇다가 정작 인간의 뿌리와 근원이 되는 것들을 잃고 마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영어 공용국인 스리랑카, 브루나이, 인도, 파키스탄, 가나, 남아공, 나이지리아, 필리핀의 사례만 보더라도 영어 공용화가 국가 경쟁력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이들은 영어 공용화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궁핍을 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영국의 외교관이자 역사학자인 E. H 카(Edward Hallett Ted Carr 1892~1982)는 일찍이 영어 사용권을 두고 현실을 인식하는 서구의 통념을 비판하면서 진보의 동력인 과학 기술의 지속적인 발전이 서구 사람들이 무시했던 아시아, 아프리카, 동유럽 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질 것으로 예측했다.
세계의 중심은 이미 서유럽권을 벗어났다고 주장하며 북아메리카를 포함한 영어 사용권이 세계사의 중심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지 여부도 확실하지 않다고 전망했다.
물론 여전히 영어가 국제적으로도 가장 강력한 언어 소통의 수단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문화에 편입되고 흡수되는 것은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것들을 상실하는 일이 된다. 오히려 우리의 것을 더 강화하고 발전시켜나갈 때 국가 경쟁력의 동원이 촉발될 것이다.
앞으로 한류 콘텐츠를 통해 성공 사례를 보여 줄 제2의, 제3의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기쁜 마음으로 기대해 볼 현시점에 우리가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말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곧 세계적인 것이다.”이다.
한류의 세계화는 다른 나라의 것들을 모방할 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한국적인 것들을 추구해 나갈 때 이뤄낼 수 있다. 한국 문화의 인지도를 높이고 널리 전파될 미래에 앞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 점검해보는 것도 의미 깊은 일이 될 것이다.
◇ 생각해볼 문제
1. 요게벳이 모세에게 민족 교육을 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2. 만약 한국에 영어 공용화가 시행됐다면 어떠한 변화가 생겼을지 상상해서 써보자.
3. 영어 공용국 중에서 경제적 궁핍을 면치 못하는 나라들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4. 영어 공용화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하고 이에 대해 논술하시오.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순영의 논술 개런티]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성공,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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