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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미국인 청소년 마이클 페이는 싱가포르에서 50여 대의 차량을 장난삼아 파손시켰다. 페이는 차량에 페인트 스프레이를 뿌리고 교통표지판 등 여러 공공 기물을 훼손시켜 결국 싱가포르 경찰에 체포됐다. 법원은 페이에게 4개월의 징역형과 벌금 2천 2백달러를 선고했고 여기에 태형(笞刑, 곤장) 6대를 보탰다. 이때 미국은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빌 클린턴 대통령이 친서를 보내기도 했다. 이런 미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는 페이에게 태형을 강행했다. 다만 미국의 외교적 노력을 감안해 태형을 6대에서 4대로 줄였다고 발표했다.
구시대의 폭력적 형벌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싱가포르는 인권 침해의 소지와 논란으로 국제 사회의 화제를 모았던 바 있다. 싱가포르는 아직도 사형 제도가 남아 있는 국가로 인구 대비 사형 집행 수가 높아 여러 차례 국제적 압력을 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줌 화상 미팅 프로그램을 통해 사형을 집행해 큰 문제가 되기도 했다.
독일의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Rudolf von Jhering 1818~1892)이 쓴 법학 최고의 고전 《권리를 위한 투쟁》에서 “강제성 없는 법은 타지 않은 촛불과 같다.”고 말한 것처럼 법에 강제성이 없다면 있어봤자 소용이 없는 규범이 되고 만다. 그러나 지나치게 강압적이면 인권의 문제가 늘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인격 모독 형태의 모든 권리 침해를 하더라도 국민은 저항하지 않고 이에 따르게 된다. 그야 말로 인간이 아닌 짐승처럼 자기 권리를 포기한 태 회의적으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싱가포르의 법이 이처럼 엄격한 것은 강력한 공권력이 강력한 독재 지배 형태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2대째 정권이 세습되고 있는 독재 국가다. 국부라고 불리는 리콴유(1923~2015) 총리는 1959년부터 1990년까지 31년간 집권했고, 그의 큰아들 리셴룽(1952~)은 2004년 총리직에 오르고 19년째 장기 집권 중이다.
정부는 소송으로 국민을 다스리고 권력으로부터 철저하게 독립이 되어야 할 법원은 정부에 충성한다. 정부가 부패하더라도 언론만 살아있으면 그 국가는 희망이 있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언론 또한 국가로부터 철저히 통제되고 있어 정부에 관한 비판은 찾아볼 수조차 없다.
이러한 싱가포르에서 눈여겨볼 큰 특징이 있다면 ‘엘리트 교육’이 국가 교육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생들의 실력에 따라 세 개의 등급으로 차별화된 교육과정을 실시하고 있다. 이 중에서 상위 1%의 우수한 고등학교 학생들을 국가를 이끌어 나갈 소수 엘리트로 키운다. 신문에 전국 학생들의 시험 점수를 전부 공개하는 정책 때문에 성적발표 직후 자살자가 속출하기도 한다.
가혹한 학생들의 학력 경쟁은 엘리트를 선별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쓰인다. 이런 방식으로 우수한 국가 공무원들을 양성, 그들에게 막강한 권력과 세계 최고 수준의 연봉을 보장하는 등 엘리트주의로 국가를 다스리고 있다. 여기에 반대하는 세력은 국가 권력으로 탄압하는 권위주의적 통치를 고수하고 있다.
또 국민에게는 능력이 있으면 얼마든지 엘리트가 될 수 있다는 논리를 주입해 국가의 지시에 순응해야 내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처럼 엘리트주의는 독재를 뒷받침해주는 든든한 근거가 된다.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하면 그 대가를 온전히 누릴 수 있다는 능력주의의 비전은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죽도록 노력한다고 해도 결코 자수성가하지 못하는 자본주의적 시스템이 작동하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정착된 사회에서 빈부에 따른 학력 격차는 어쩔 수 없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학교 성적은 자본소득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학생들이 학교에서 동등한 교육을 받고 있다고 해도 학교 밖에서는 경제적 여력에 따라 교육 격차는 발생하게 된다.
싱가포르의 소득격차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빈부격차와 계층 간 소득의 불균형 정도를 나타내는 수치)는 0.487로 세계 2위를 차지할 정도로 극심하다. 싱가포르의 소득 수준이 세계 9위인 것을 감안하면 소수 엘리트 계층에게 부가 편중돼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사실 싱가포르의 기간산업이나 주요 회사는 리콴유 가족과 인민행동당이 차지하고 있다. 모든 국민이 평등한 것 같지만 더 평등한 엘리트들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특히 말이다.
싱가포르는 철저하게 엘리트주의로 통제되는 사회이기 때문에 국가는 엘리트로 등극한 계층에 대해 부와 권력을 보장해준다. 공무원 연봉이 세계 최고의 수준에 해당하는 것은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된다. 장관의 연봉은 10억 원을 넘어가기도 하고 총리 연봉은 20억이 넘는다.
재밌는 사실은 장관을 부자들로 구성한다는 것이다. 부자들은 관직에 오르더라도 부정축재의 가능성이 적다는 이유로 말이다.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엘리트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견강부회(牽强附會,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 붙여 자기에게 유리하게 한다는 뜻의 고사성어)에 불과하다. 가난하면 장관이 될 수 없으니 말이다. 이쯤 되면 능력주의는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피지배층을 억압하는 폭력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능력주의는 엘리트들이 ‘성공하지 못한 건 너의 게으름 때문이다.’라는 프레임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좁은 범위에서 능력주의는 나쁠 게 없다. 열심히 노력해서 능력을 키워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이를 누리며 사는 게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건물이 수백 개 있는 자본가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나 가만히 있어도 부가 증식되는 사람들이 평생 노동해서 모은 재산으로 건물 한 채 갖기도 힘든 서민에게 능력주의를 논하는 건 문제다. 게다가 능력주의 논리에 길들여진 국민에게 사회 불평등은 능력주의로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건 심히 비양심적이다. 그들이 엘리트가 되지 못한 것은 생존 경쟁에서 도태되고 낙오되었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싱가포르가 최저 시급제를 시행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국민의 저임금 규제 완화를 통해 이익을 극대화하는 경제 체제와도 맞물려 굳이 경쟁에서 진 사람들을 보호해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니 싱가포르가 노동자들 권익을 보호할만한 사회적 안정망이 약한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싱가포르는 국가적 차원에서 노조 또한 탄압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비정규직 형태의 일자리가 만연되어 있고 노동시간도 긴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저항을 막기 위해 시위를 통한 의견 표출도 법으로 금지시키고 있다.
하버드대 정치철학 교수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1953~)은 그의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가 우리 재능에 대해 주는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의 업적이 아니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 가진 자로 태어나서 부와 사회적 계층을 세습해 가는 것은 100% 본인의 능력과 재능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들이 성공하는 과정에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공동체의 빚을 지고 있는데, 이에 대해 자신의 인생에 들어온 ‘행운’으로 인식하고 겸손한 자세로 공동선에 일정한 기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여기서 ‘공정(公正)하다.’는 것에 대한 재인식의 필요성을 느낀다. 능력만큼 얻어가는 사회가 공정한 것인지, 불평등한 출발선을 고려해 먼저 출발한 엘리트들이 자기가 받은 혜택과 특권을 사회에 환원하는 게 공정한 것인지 하는 물음에 대한 답 말이다.
세상에는 초월적 능력 없이는 시작은 물론 결과도 불평등한 경기들이 존재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성취하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사회적 구조들이 있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제아무리 노력하고 열심히 살아 돈을 모은다고 할지라도 자본가의 부의 증식을 따라갈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 능력주의를 운운하며 “네가 경기에서 진 것은 네 능력 부족 탓이야. 받아들여.”라고 말하는 것이 우리 사회 속에서 수용되는 사회가 되는 순간 엘리트들의 폭정은 시작된다.
◇ 생각해볼 문제 ◇
1. 능력주의, 엘리트주의는 어떻게 독재를 뒷받침할 수 있을까?
2. 법과 처벌이 지나치게 엄격한 사회에서 오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3.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너의 게으름 탓이다.’는 말이 적용되지 않는 상황을 서술해보자.
4. 능력주의의 폭정을 어떻게 시작되는 것인지 글을 참고해 쓰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 무엇이 있는지 서술하시오.
5. 능력주의는 과연 공정한 것인지 자신의 의견을 서술하시오.
[이순영의 논술 개런티] 능력주의는 과연 공정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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