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수의 우리 아이, 이슈&저널] 자녀가 “계좌만 잠깐 빌려줘”라는 말을 듣는다면
서민수 경찰관
기사입력 2026.09.09 09:00
  • 기억하실까요. 초창기 인터넷 중고거래가 한창 활기를 띠기 시작했을 때, 사진으로는 멀쩡한 명품 가방과 고급 패딩을 올려놓고 돈을 받은 뒤 감쪽같이 사라지는 물품 사기가 적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비싼 패딩을 구매했는데, 택배 상자를 열어보니 옷 대신 벽돌이 들어 있었다는 황당한 일도 있었죠.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돈을 잃은 것도 억울하지만, 정성스럽게 포장된 벽돌을 마주하는 허탈감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겁니다.

    그 뒤 안전 결제와 본인인증 같은 장치들이 생기면서 이제 좀 나아지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범죄는 가만히 있지 않죠. 거래 환경이 달라지면 사기 수법도 따라 움직이는 게 범죄의 속성입니다. 최근에는 스마트폰과 인터넷 공간을 이용한 사기범죄에 청소년까지 가담하는 사례가 제법 등장한다고 합니다. 이제 부모님들은 아이들의 용돈뿐 아니라 ‘디지털 경제활동’까지 챙겨야 할 때가 됐습니다.

    최근 경찰청 자료를 보면 지난해 사기 혐의로 검거된 10대 이하 피의자는 7788명에 달했습니다. 하루 평균 20명이 넘는 청소년이 사기 혐의로 검거된 셈이죠. 전체 청소년 사기 피의자가 최근 감소하는 추세인 점은 다행이지만, 문제는 범죄의 방식입니다. 오히려 ‘컴퓨터등사용사기’ 혐의로 검거된 10대 이하 피의자는 2021년 144명에서 지난해 195명으로, 4년 사이 35.4%나 증가했죠.

    숫자가 알려주는 신호는 분명합니다. 아이들의 사기가 단순히 늘었다기보다 사기의 무대가 스마트폰 속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온라인 거래는 특별한 일이 아니잖아요.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팔고, 게임 아이템을 사고팔고, SNS를 통해 공동구매를 하는 것도 유별난 일이 아닙니다. 부모 세대가 문구점에서 직접 돈을 내고 물건을 샀다면, 요즘 자녀들은 얼굴 한 번 보지 않은 사람과 계좌번호 몇 번 입력하는 것만으로 거래를 끝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부모님들이 주목해야 할 ‘빈틈’이 있습니다. 온라인에서는 상대방의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물건값을 받고도 물건을 보내지 않았을 때 상대방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얼마나 곤란해졌는지 눈앞에서 볼 수 없죠. 그러다 보니 아이들에게는 범죄의 무게마저 가볍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몇 만 원인데 뭐”, “게임 아이템인데 뭐”, “다른 애들도 하는데 뭐”라는 생각이 들기 십상이죠.

    특히 아이들 사이에서 위험한 단어가 하나 있는데, 바로 ‘잠깐’​입니다. “계좌를 잠깐 빌려줘.”, “네 아이디로 잠깐 받아줘.”, “돈만 잠깐 대신 받아주면 돼.”, “이 물건 네가 잠깐만 대신 올려줘.” 아이에게는 친구 부탁 하나 들어주는 게 뭐가 어렵겠습니까. 하지만 그 ‘잠깐’이 사기범죄의 시작일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본인이 직접 피해자를 속이지 않았더라도 계좌를 제공하거나 돈을 전달하고, 계정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얼마든지 범죄에 연루될 수 있다는 걸 꼭 기억해 주세요.

    더 우려되는 건, 아이들이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를 쉽게 넘나들 수 있다는 점입니다. 게임 아이템 사기를 당해본 아이가 “나도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중고거래에서 돈을 떼인 경험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다 비슷한 수법을 학습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한 아이가 피해자였다가 어느 순간 가해자가 되는 일도 청소년기에는 충분히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부모의 디지털 교육도 이제 달라져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아이들에게 “사기당하면 안 돼”라고 가르쳤습니다. 모르는 링크를 눌러서도 안 되고, 개인정보를 알려줘서도 안 되고, 특히 이상한 사람에게 돈을 보내는 건 큰일 날 일이라고 당부했죠. 하지만 지금은 여기에 “최근에 중고거래한 적 있어?”, “게임 아이템을 친구끼리 사고팔기도 하니?”, “누가 계좌나 아이디를 빌려달라고 한 적은 없어?”와 같은 질문도 추가해야 합니다.

    특히, 부모가 질문하는 태도도 신중해야 합니다. 경찰 조사하듯 캐묻기보다는 부모가 먼저 “뉴스를 보니까 요즘 이런 일이 많다더라”라며 자연스럽게 대화의 문을 여는 게 좋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아이의 스마트폰을 검사하는 것보다 아이가 어떤 거래를 하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게 핵심입니다.

    우리는 지난 칼럼을 통해 아이를 둘러싼 디지털 환경이 녹록지 않다는 걸 충분히 공감했습니다. 아이가 집에 있다고 해서 안전한 것도 아니고, 방문을 닫고 공부한다고 해서 혼자 있는 것도 아니죠. 아이의 스마트폰 안에는 게임 친구도, 중고거래 상대도, SNS에서 처음 만난 ‘낯선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제는 그 낯선 사람 가운데 누군가가 아주 친절한 말투로 “돈 좀 벌어볼래?”라고 말을 걸 수도 있다는 것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부모님들에게 아이의 스마트폰 사용시간만 묻지 말고, “요즘 스마트폰으로 돈을 주고받는 일은 없니?”​라는 질문도 하나 추가해 달라고 당부합니다.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사준 순간 우리는 통신기기 하나만 건넨 게 아닙니다. 아이들의 스마트폰 속에는 은행도 들어 있고, 시장도 들어 있고, 게임장도 들어 있습니다. 어쩌면 낯선 사람과 얼마든지 거래할 수 있는 ‘장터’까지 함께 건넨 셈입니다.

    결국, 아이들의 경제교육도 이제 ‘용돈 기입장’ 정도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아이의 지갑이 어디에 있는지를 챙기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 지갑이 스마트폰 안에서 누구와 연결돼 있는지까지 살펴보는 일입니다. 이제 부모가 챙겨야 할 아이의 지갑은 주머니 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꼭 기억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