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슈아 박의 ‘AI시대, 경계의 캠퍼스’] AI가 인간에게 졌던 날…대학이 가르쳐야 할 능력
조슈아 박 조지메이슨대학교 한국캠퍼스 대표
기사입력 2026.07.13 10:10
  • 2019년 2월, 샌프란시스코의 한 무대에서 인간과 기계가 토론으로 맞붙었다. 한쪽은 IBM이 7년에 걸쳐 개발한 인공지능 ‘프로젝트 디베이터’, 다른 한쪽은 국제 토론대회 최다 우승 기록을 가진 인간 챔피언 ‘하리시 나타라잔’이었다. 

    주제는 ‘정부가 유아교육을 재정적으로 지원해야 하는가’. IBM에게 이 대결은 상징적이었다. 체스 세계 챔피언을 꺾은 ‘전략의 마스터’ 딥블루, 퀴즈쇼 우승자를 꺾은 ‘지식의 마스터’ 왓슨에 이어, 이번엔 토론을 정복해 ‘사고의 마스터’로 3관왕에 오르겠다는 다음 그랜드 챌린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 다수의 청중은 인간에게 설득됐다. AI는 근소한 차이로 졌다.

    필자에게 이 대결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하리시가 대학생 토론자로 국제 무대에 서던 시절부터 심사위원으로 그를 지켜봤고, 세계학생토론대회(WSDC)에서는 그가 홍콩 국가대표팀 코치로 길러 낸 학생들을 심사했으며, 여러 국제대회에서 심사위원장을 함께 맡았다. 

    공교롭게도 반대편, 프로젝트 디베이터를 만든 IBM 연구진에도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 세계 대학생 토론대회 무대에서 활약한 챔피언 출신 연구자 ‘댄 라하브’ 역시 필자와 여러 대회에서 심사위원장을 나란히 맡았던 동료다. 토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토론하는 기계를 만들고, 토론 챔피언이 그 기계와 맞선 셈이다. 20년 넘게 토론 교육에 몸담아 온 필자에게 그 무대는 인간 지능과 인공지능의 최전선으로 보였다.

    당시 IBM 연구진은 AI와 인간 사이의 간극을 인정했다. 훗날 이 프로젝트를 정리한 네이처 논문은 그 이유를 짚었다. 논증과 토론은 승패가 명확한 체스나 바둑과 달리 인간 지능의 가장 근본적인 능력에 속한다고. 근거를 세우고, 반박하고, 판단을 내리는 일 — 오래도록 인간만의 영역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무대는 지금 다시 보면 ChatGPT의 출현이 모든 것을 바꿔 놓기 전, 지난 시대의 풍경이다.

    ◇ 판이 뒤집혔다

    2025년  ‘네이처 인간행동’에 실린 실험은 흥미로운 결과를 내놨다. 900명이 참여한 온라인 토론에서 상대 정보가 없을 때 GPT-4의 설득력은 인간과 팽팽했다. 그러나 나이·성별 같은 기본 정보가 주어지자 논거를 상대에 맞춰 조정하며 생각을 돌려놓을 확률이 인간보다 81%나 높아졌다. 같은 정보를 쥔 인간은 그러지 못했다. 요컨대 AI는 논리의 깊이에서 숙련된 인간을 넘어선 것이 아니라, 압도적인 정보력으로 상대를 읽고 파고드는 맞춤형 설득에서 인간을 앞선 것이다. 

    연구 책임자의 표현은 서늘하다. 

    “AI의 초인적 설득력은 이미 현실이다.” 

    불과 6년 사이에 AI는 청중 앞에서 챔피언에게 근소하게 지던 도전자에서, 내가 누구이든 바로 나를 겨냥해 더 잘 설득해 내는 존재로 올라섰다. 그리고 이 능력은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발전하고 있다.

    국제 토론 현장도 이 변화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 온라인 학생 토론대회에서는 AI 사용을 막기가 사실상 어려워졌고, 이것이 토론 교육의 본질을 해친다는 푸념과 비판이 이어진다. 심지어 심사위원 자격시험에서까지 무분별한 AI 사용이 확인될 정도다. 

    “AI가 인간처럼 토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이제 무의미하다. 답은 ‘그렇다’, 심지어 ‘우리보다 낫다’이다. 스탠퍼드 HAI의 'AI 인덱스 2026'에 따르면 대학생 다섯 명 중 네 명이 이미 생성형 AI를 쓴다. 좋은 답, 그럴듯한 논거, 매끄러운 발표문은 누구나 몇 초 만에 얻는다. 바로 여기서 대학은 훨씬 더 어려운 질문 앞에 선다. 답이 흔해진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 인터넷과 AI의 대전환, 역사는 반복된다

    이 질문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다. 20여 년 전, 내가 강단에 서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마침 자료 조사 방식이 도서관에서 인터넷 검색으로 넘어간 무렵이었다. 사서와 편집자의 손을 거친 서가를 온갖 정보가 나오는 검색 포털과 누구나 묻고 누구나 답할 수 있는 기능이 대체하면서 ‘정보의 홍수’가 낳는 부작용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 걱정은 교실에서 곧 현실이 됐다. 학기말 집필 과제를 채점하다 보면 인용의 상당수가 ‘네이버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지식인은 질문자가 마음에 드는 답 하나를 채택하고, 답변자는 그것으로 점수와 등급을 쌓는 구조였다. 정확한 답보다 마음에 드는 답이 보상받는 셈이었다. 누가 썼는지도 모를 답변을 사실인지 따져 보지도 않은 채 버젓이 근거 자료로 가져왔다.

    검증 없는 인용이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 준 또 다른 사건도 그 무렵에 있었다. 2004년, 하버드대 총장은 여름 프로그램 환영식에서 “1970년대 서울에는 미성년 성매매 여성이 100만 명에 달했으나 경제성장이 가져다 준 놀라운 기회 덕분에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고 말했다. 한국의 압축성장을 추켜세우려던 발언이지만, 당시 서울의 10대 소녀를 다 합쳐도 나오기 어려운, 숫자부터 틀린 이야기였다. 현장에 있던 한국 인터넷 매체의 통신원은 이 역산을 근거로 기사를 올렸는데, 제목에는 ‘70년대 서울 소녀는 모두 창녀였다’는 — 총장이 하지 않은 — 문장이 따옴표째 걸렸다. 항의 이메일이 쏟아졌고 현직 장관까지 공개 비판에 나섰으며, 총장은 열흘 만에 “통계를 잘못 기억했다”며 공식 사과문을 보냈다. 

    그런데 이 사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반전이 하나 더 있다. 당시 한 주요 영자신문의 주간 칼럼니스트였던 필자가 이 사건을 다루며 모교인 하버드 측에 이메일로 직접 확인해 보니 총장의 정정은 파문이 일기도 전에 이미 현장에서 이루어진 상태였다. 바다 건너의 분노와 ‘공식 사과’ 요구는 이미 바로잡힌 발언을 향한 뒷북이기도 했던 것이다. 필자가 훗날 토론 교재에서 ‘조사하기’의 사례로 오래 삼아 온 이유는 그 겹겹의 아이러니 때문이다. 

    최고 지성의 상징이라는 하버드 총장은 검증하지 않은 숫자를 연설에 올렸고, 그 오류를 꼬집던 기사는 하지 않은 말을 제목에 담았으며, 사람들은 원문도 정정 사실도 확인하지 않은 채 분노를 퍼 날랐다. 검증의 부재는 이렇게 층층이 쌓인다. 그리고 어느 층에서든 그것을 걸러 낼 책임은 읽는 사람에게 남는다.

    20여 년이 지나 또 다른 대전환의 시기인 오늘, 도구만 바뀐 채 같은 장면이 되풀이된다. 학생들은 이제 지식인 대신 생성형 AI에게 묻고, AI가 내놓은 그럴듯한 답을 그 출처가 실재하는지 의심하지 않은 채 그대로 가져온다. 존재하지 않는 논문을 지어내거나 존재는 하여도 내용을 원하는 방향으로 왜곡하는 다양한 유형의 ‘환각(hallucination)’까지 더해져 문제는 더 교묘해졌다. 

    닮은 것은 또 있다. 오늘의 AI 역시 훈련 방식에 따라 사용자가 ‘채택’할 법한 답, 즉 정확한 답보다 듣기 좋은 답을 먼저 내놓도록 길들여지곤 한다. 그 시절 채택 버튼이 알고리즘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필요한 것은 똑같다. 도구를 다뤄 답을 찾는 솜씨만이 아니라, 그 답을 의심하고 검증하는 습관이다. 이것이 AI 시대에 우리가 가르쳐야 할 가장 중요한 능력, 비판적 사고다.

    ◇ AI가 똑똑해질수록 뇌는 게을러진다

    이 능력은 저절로 자라지 않는다. 오히려 편리한 도구가 그것을 갉아먹기도 한다. 2025년 MIT 미디어랩 연구진이 학생들에게 에세이를 쓰게 하며 뇌 활동을 측정했더니 ChatGPT에 의존한 집단은 뇌의 활성도가 낮았고 자신이 쓴 문장을 잘 기억하지 못했으며 글에 대한 주인의식도 옅었다. 완성된 글은 매끄러웠지만 사고의 근육은 덜 쓰인 것이다. 과제가 거듭될수록 AI 의존은 깊어졌고 비판적 사고 기능은 약화됐다. 

    연구진은 이를 ‘인지적 부채’(cognitive debt)라 불렀다. 지금 편하게 빌려 쓴 사고력을 나중에 이자까지 붙여 갚게 된다는 뜻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이다. 먼저 스스로의 생각으로 에세이를 쓴 뒤 AI의 도움을 받은 학생들은 뇌 회로가 활발히 작동했다. 답을 먼저 AI에게 맡기면 사고가 위축되고, 스스로 씨름한 뒤 도구로 쓰면 사고가 확장된다. AI를 언제, 어떻게 쓰느냐가 쓰느냐 마느냐만큼 중요한 것이다. 교육이 지켜야 할 선이 바로 여기에 있다.

    ◇ 정답이 아니라 판단을 가르치는 일

    AI 시대의 교육은 방점을 옮겨야 한다. ‘대체’가 아니라 ‘증강’으로, 산출물이 아니라 판단 과정으로. 다소 비효율적으로 보이더라도 학생이 먼저 씨름하고 그 뒤에 AI의 보완을 받도록 설계해야 확장된 사고의 근육 위에서 AI의 답이 맞는지 가려내는 판단력도 자란다. 문제를 어떻게 정의했는가, AI의 답을 어떻게 검증했는가, 반례를 찾아 어떻게 고쳤는가 — 이 사고의 궤적이 곧 배움이다. 좋은 답은 AI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 답을 믿어도 될지 최종 승인하는 책임은 언제나 인간의 몫이다.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도 이미 이 방향으로 움직였다. 기준은 ‘AI를 쓸 줄 아는가’가 아니라 ‘AI를 관리·감독할 수 있는가’다. 결과를 뽑아내는 속도보다 정확성·저작권·보안·편향 같은 위험을 식별하고 통제하는 ‘품질관리’(Quality Control)와 ‘규정준수’(Compliance) 역량이 중요해진 것이다. 이 역량은 한 분야의 지식만으로 길러지지 않는다. 기술과 윤리, 데이터와 맥락을 함께 읽어야 하기에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융합교육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 그래서, 다시 토론이다

    이 모든 능력 — 근거를 세우고, 반박하고, 판단하고, 책임지는 힘 — 이 물론 한 가지 방법으로만 길러지는 것은 아니다. 깊이 읽는 독서가, 치밀하게 따지는 수학이, 꾸준한 글쓰기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고의 근육을 만든다. 다만 이 능력들을 한자리에서 실시간으로 살아 있는 상대와 부딪히며 훈련하는 가장 오래된 방법을 꼽으라면 필자는 주저 없이 토론을 꼽겠다. AI가 정복하려 했으나 인간 지능의 근본이라 불렸던 바로 그 토론이 이제 AI 시대에 인간을 지키는 훈련장이 된다는 것이다.

    AI가 압도적인 정보력으로 나를 겨냥해 설득하는 시대에는 쏟아지는 논거의 홍수 속에서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물리칠지 가려내는 힘이 곧 생존 능력이다. 그리고 그렇게 벼려진 비판적 사고만이 나보다 나를 잘 아는 AI를 감독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 흥미롭게도 IBM은 프로젝트 디베이터를 인간을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양쪽 주장을 모두 제시해 편향을 줄이는 ‘증강 도구’로 설계했다고 밝혔다. AI의 목표조차 대체가 아니라 더 나은 판단을 돕는 데 있었던 셈이다.

    필자가 소속된 조지메이슨대학교의 ‘AI2Nexus’도 같은 방향이다. AI를 교육·연구·운영에 통합하되, 학습을 촉진하고 책임 있는 혁신으로 이어지게 한다는 원칙이다. 우리 한국캠퍼스의 수업에서도 교수와 과목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AI를 ‘사고의 가속기’로 쓰되 팀을 이뤄 문제를 정의하고 서로의 논거를 반박하며 답을 의심하고 검증하는 훈련을 함께 하는 풍경이 일반적이다. AI 사용을 숨기게 하는 교실이 아니라 드러내놓고 따지게 하는 교실. 교사의 역할도 정답 공급자에서 코치이자 품질관리자로 옮겨 간다.

    ◇ 대학이 끝까지 가르쳐야 할 것

    2019년 AI가 졌던 그날, 가장 큰 의미는 ‘인간이 이겼다’가 아니었다. 토론이 정답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 지능의 가장 깊은 자리에 있다는 사실의 확인이었다. 이제 AI가 우리보다 더 능수능란하게 설득하는 시대가 왔지만, 바로 그렇기에 그 자리는 더 중요해졌다. 누구의 논거를 믿을지, 어디서 멈출지, 무엇에 책임질지를 정하는 것은 끝내 인간이기 때문이다.

    AI는 이제 누구에게나 맞춤형으로 답을 내놓는다. 저마다의 손에 저마다에게 꼭 필요해 보이는 지도를 쥐여 준다. 그러나 그 지도를 받아 들고 어디로 갈지, 길이 틀렸다 싶을 때 멈춰 설지, 다시 확인하고 방향을 고쳐 잡을지를 정하는 것은 사람이다. 가장 빠른 차를 모는 학생이 아니라, 어디로 가야 할지 판단할 줄 아는 학생. 대학이 끝까지 가르쳐야 할 능력은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