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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 발음은 어떻게 지도해야 하나요?”
학부모를 대상으로 강연을 하다 보면 자주 받게 되는 질문이 있다. 바로 아이의 영어 발음에 대한 궁금증이다.
영화 ‘러브 액추얼리’(Love Actually)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영국 사내가 미국으로 건너간다. 이 남성이 바에서 맥주를 주문하면서 영국 발음을 구사하자, 미국 미녀들이 그에게 관심을 보인다. 미국 사람들조차도 영어의 원조인 영국 발음을 멋있어 한다는 내용을 영국 사람 입장에서 코믹하게 그려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체로 미국식 발음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영어권에서는 영국 상류층 발음, 이른바 ‘Posh accent’이 주는 상징성과 위상이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동양 남성이 영국식 발음을 구사하더라도 발음에 비해 전달하는 내용이 부족할 경우 부자연스럽거나 가볍게 보일 수 있으며, 오히려 신뢰를 얻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반면, 동양 여성의 경우, 동일한 발음이 보다 긍정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발음 자체뿐 아니라 화자의 이미지와 맥락이 함께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무슨 성차별, 인종차별적 소리지?’라는 반응이 나올 수 있다. 다만 이는 우리 사회가 영어 발음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경향을 풍자적으로 드러내 표현해봤다.
아이가 유창한 미국식 발음으로 책을 읽어나가는 것을 본 옆집 엄마는 “어머, 아이가 어쩜 이렇게 영어를 잘해요”라고 칭찬을 한다. 엄마는 괜히 우쭐해지면서 아이가 자랑스럽다. 글로벌 스타가 된 한국 유명 스포츠인이 외신 기자의 인터뷰를 영어로 하는 것을 보면서 내용은 들리지 않지만 발음만 듣고 “역시 외국인 코치와 훈련을 하더니만 영어를 잘하네.”라고 말하곤 한다.
‘원어민=미국인’이라는 인식이 강한 보통 한국인이라면 미국식 발음을 구사하면 할수록 영어를 잘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원어민이 들어도 영어를 잘한다고 할까?
발음만 듣고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좀 섣부른 판단일 경우가 많다. 대화 상대는 발음보다는 내용에 집중해서 듣기 때문이다. 외신기자와 인터뷰를 하던 세계적 스포츠 스타는 발음만 좋을 뿐 질문에 계속 동문서답을 하고 있었다. 상대방이 이 질문을 왜 하는지 관점 획득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듯 보였다.
영어도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커뮤니케이션 도구다.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기 위해서는 ▲어법에 맞게 구사하는 ‘언어자각력’ ▲논리적으로 자기의 말을 풀어가는 ‘사고력’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관점획득력’ 이 세 가지를 갖춰야 한다. 그 다음 이해할 수 있는 ▲’발음’이 필요하다. 발음은 원어민 수준의 발음이 아니라 남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면 족하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정체성이 드러나는 발음이다.
옥스포드대학 출판부 또한 영어를 영국이나 미국 사람들만의 언어가 아닌 글로벌 언어로서 접근해야 한다는 ‘포지션 페이퍼’(Position Paper)를 발표한 바 있다. 영어 대화의 80%가 비원어민 간의 대화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원어민들도 이들의 발음을 알아듣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원어민의 발음을 추종할 필요가 없고, 이해 가능한 자신만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발음이 오히려 존중받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필자가 개발한 영어 인공지능 친구 LAURA에게 6만 시간의 한국, 중국, 일본, 터키, 스페인 어린이들의 영어발음을 학습시킨 이유다.
이왕이면 미국식 발음이 좋다고 얘기하기보다 남이 이해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발음이라고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대개의 경우 미국식 발음을 수준 높은 발음으로 보지 않는다. 영어를 구사하는 인구 중 미국인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문화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미국식 발음을 동경하는 집단은 한·중·일 정도일 것이다. 미국인조차도 오히려 정통 영국식 발음인 포시 악센트, 퀸즈 잉글리시, 옥스퍼드 잉글리시를 격이 높은 영어로 인정할 때가 많다.
둘째, 그렇다면 이제부터 영국식 발음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미국식이든 영국식이든 남의 나라 발음을 동경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중요한 것은 어느 나라식 발음이 아니라 내용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이다. 위에 언급한 ▲언어자각력 ▲사고력 ▲관점획득력을 갖추지 못한 채 발음만 좋은 사람만큼 무식하게 보이는 사람도 없다. 즉 중요한 것은 말하고자 하는 내용, 즉 콘텐츠가 명확하고 그것을 위의 세 가지를 갖춘 상태에서 전달하는 것이다. 요즈음 TOEIC 같은 영어 공인 시험에서도 다양한 국적(미국, 영국, 호주 등)의 영어 발음이 나오는 이유다.
그렇다면 어떤 발음이 좋은 것일까? 자신만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발음이 가장 좋다. 즉, 나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 외국어로써 습득했기 때문에 너네와 같은 수준의 어휘량과 발음을 갖추지는 못한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발음. 상대방이 듣고 내 국적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더더욱 좋다.
외국에 나가서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보았나? 우리가 듣던 소위 원어민 발음을 하는 사람을 흔히 보게 되던가? 오히려 자신의 성장 배경, 문화, 교육 수준 등등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다양한 발음을 더 많이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원어민, 특히 미국인 발음을 흉내 내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감추려 하는가?
원어민은 자신과 같은 발음을 하는 외국인을 볼 때에 더 어색해한다. 이것은 마치 나와 똑같은 발음으로 한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인을 대할 때의 어색함과 같다. 오히려 상대방이 정체성이 드러나는 발음을 할 때에, 그러면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명확할 때에 그 사람과 그의 주장을 더 높게 평가한다. 싱가포르, 인도, 프랑스, 체코, 이탈리아, 브라질 등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은 다 자기만의 특징적 영어 발음을 구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미국인 흉내는 내지 않는다.
‘I'm sorry my English is not good.’
원어민과 얘기할 때 이런 식으로 자신이 영어 발음을 두고, 영어를 잘 못한다고 하면서 말을 시작하는 한국인들을 자주 보았다. 생각 있는 원어민이라면, ‘No problem, my Korean is worse.’라며 나는 너네 말 못 하는데 네가 우리말 못하는 게 뭐가 문제냐? 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 한국인이 영어를 잘한다고 더 대단한 것도 아니고 못한다고 모자란 것도 아니다. 2개 국어 이상을 하는 사람은 미국인이나 영국인보다 한국인이 더 많다.
영어 잘하는 게 벼슬도 아니고 못한다고 문제될 것 없다. 다만, 자신의 모국어를 잘 못하는 건 문제다. 무엇이 모국어를 잘하는 것일까? 해당 언어로 싸울 수 있어야 한다. 욕을 잘하는 게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세가지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거나 동의를 구해내거나 또는 설득할 수 있는 능력. 이왕이면 한국어와 영어로 싸울 수 있는 이중언어자가 된다면 사는 게 좀 더 편해질 것이다. 우리는 늘 본질을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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