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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형 AI의 등장은 교육 현장의 많은 것들을 바꾸어 가고 있다. 이제 학생들은 모르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지 않고 AI에게 묻는다. 수행평가 과제를 마주하면 스스로 생각하여 문장을 짓기보다 AI에게 프롬프트를 입력해 매우 ‘그럴싸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질문 하나로 수 초 만에 완성되는 수려한 문장들을 결과물로 제출하면 얼핏 보기엔 지식의 습득 속도가 빨라진 듯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학생들의 ‘사고 근육’은 유례없는 퇴화 위기라 볼 수 있다.
AI가 모든 답을 대신해 주는 시대, 학생들에게 어떠한 능력이 요구될까? 그 해답은 역설적이게도 기술이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문장을 만드는 힘’에 있다. 타인의 생각이 아닌, AI의 데이터 조합이 아닌, 자신의 내면에서 쌓아 올린 단어로 세상을 해석하는 힘이야 말로 이 시대에 필요한 능력이다.
◇ 어휘력, 사고의 지도를 그리는 유일한 도구
흔히 어휘력을 ‘단어를 많이 아는 것’ 정도로 치부하곤 한다. 하지만 어휘는 단순한 소통의 수단을 넘어, 인간이 세상을 인지하고 사고를 확장하는 ‘지도의 경계선’과 같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지역은 갈 수 없듯이, 자신이 보유한 어휘의 범위를 넘어선 생각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라고 말했다. 아이가 ‘슬프다’는 단어 하나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때와 ‘애틋하다’, ‘비통하다’, ‘공허하다’는 단어를 구별해 사용할 때 그 아이가 느끼는 세계의 깊이는 완전히 다르다. 정교한 어휘를 가진 아이는 복잡한 현상을 세밀하게 쪼개어 분석할 수 있고, 모호한 개념을 명확한 논리로 재구성할 수 있다.
AI가 쏟아내는 문장들은 방대한 데이터를 조합한 결과물일 뿐, 그 단어에 담긴 맥락과 무게를 이해한 결과가 아니다. 아이가 스스로 어휘력을 기르지 않은 채 AI에 의존하게 된다면, 자신의 생각을 정밀하게 그려낼 ‘지도’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사고의 주도권을 기계에 내주어, 타인이 규정한 세상 속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학생들의 손에 '책'과 '낱말'을 쥐여주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출력(Output)’이 없는 입력은 단순한 지적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정보 과잉의 시대다. 학생들은 유튜브, 숏폼, 그리고 AI를 통해 그 어느 세대보다도 많은 정보를 ‘입력(Input)’받고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정보의 습득은 대부분 ‘지적 유희’ 수준에서 멈춘다. 화려한 영상과 매끄러운 AI의 답변을 보고 듣는 것은 결코 아이의 실력이 될 수 없다.
진정한 학습은 입력된 정보를 자신의 언어로 재구성하여 밖으로 내뱉는 ‘출력(Output)’ 과정에서 일어난다. 리딩엠이 독서 이후에 반드시 글쓰기를 수행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뇌 과학적으로 볼 때, 읽기만 하는 행위는 뇌에서 '전두엽 특히 배외측 전전두엽'과 브로카 영역이 활성화된다. 배외측 전전두엽은 묵독 시 주로 활성화되며, 집중력, 사고력, 계획, 문제해결 등 고등 정신 작용을 관장한다. ‘브로카 영역’은 전두엽 하부에 위치해, 단어의 의미를 처리하고 문장을 구성하는 등 언어 생성과 문법 처리에 관여한다. 그것을 글로 옮기기 위해 고민하는 과정에서는 뇌 전체가 활성화된다. 흩어진 정보를 논리적 순서에 맞게 배치하고, 적절한 연결어를 찾아 문장을 잇는 행위는 고도의 인지 활동이자 창조적 작업이다. 쓰기가 반복될수록 시각, 언어, 감각 영역 간의 신경 회로가 짧은 시간에 상호 작용하며 문해력과 인지 기능이 발달한다.
만약 학생이 AI로 만든 글을 제출하며 과제를 끝냈다면, 그것은 ‘공부’를 한 것이 아닌 AI에게 시킨 ‘심부름’에 불과하다. ‘나만의 문장’을 만드는 훈련, 고통스럽더라도 스스로 글을 써 내려가는 ‘출력’의 경험이 없는 아이는 지식의 구경꾼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입력된 데이터가 나의 철학으로 승화되는 지점은 오직 쓰기에서 시작된다.
◇ 어휘를 알고 활용하는 것이 진정한 문해력의 완성
오늘날 교육계의 최대 화두인 ‘문해력(Literacy)’은 단순히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만 요구하지 않는다. 진정한 문해력은 맥락을 읽어내고, 습득한 어휘를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학생이 책은 많이 읽는데, 정작 무슨 뜻인지 물어보면 말을 못할 때, 그것은 어휘를 ‘눈’으로만 익혔을 뿐, ‘입’과 ‘손’으로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아는 것과 그 단어를 문장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별개의 영역이다.
문해력의 완성은 ‘활용’이다. 비판적 독서를 통해 글쓴이의 의도를 헤아리고, 자신이 가진 어휘 창고에서 가장 적절한 단어를 골라내어 동의하거나 반박하는 글을 써보는 경험이 반복될 때 비로소 문해력은 성적을 올리는 도구를 넘어 '세상을 살아가는 무기'가 된다.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 서술형·논술형 평가를 강화하는 이유도 결국 '스스로 생각하고 이를 글로 표현하는 힘'이 미래 인재의 핵심 역량이기 때문이다.
◇ 문해력의 격차를 실감하기 전에
AI는 우리에게 ‘답’을 찾아주지만, ‘질문’과 ‘성찰’은 주지 않는다. 학생들이 책 한 권을 읽더라도 그 속의 단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몇 줄이라도 자신의 생각을 문장으로 정리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AI가 대신할 수 없는 영역, 즉 ‘나만의 고유한 문장’을 가진 아이는 그 어떤 기술적 변화 속에서도 도태되지 않고 그 기술을 도구로 삼아 더 넓은 세상을 호령할 것이다. 지금 우리 아이의 손에 들린 것은 스마트폰인가? 아니면 사고의 지도를 그려낼 연필과 책인가? 이 선택이 학생의 문해력을 결정짓는다.
[리딩엠의 독서논술] 생성형 인공지능과 학생들의 ‘사고근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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