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리스토텔레스는 얼굴이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창(窓)’이라고 여겼고, 키케로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얼굴은 세대, 성(性), 문화에 상관없이 다른 사람의 감정을 가늠하는 보편적인 방법으로 여겨지고 있죠. 눈썹을 치켜올리는 건 혼란스럽다는 표현이고, 미소는 행복, 찡그린 얼굴은 슬픔이나 불안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사회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는 이러한 표정을 해석하는 관념도 제법 바뀐 듯합니다.
2020년 9월 서점가에는 미국의 심리학자 폴 애크먼(Paul Ekman)이 쓴 ‘표정의 심리학’이라는 책이 화제가 된 적 있습니다. 저도 책을 사서 흥미롭게 읽었고요. 무엇보다 아이들의 표정을 통해 정서를 읽고 공감하는 데 도움받았습니다. 애크먼 박사는 인간의 표정에 관한 과학적 통념을 바꾼 인물로 유명한 데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을 자문한 이력으로도 유명합니다. ‘표정의 심리학’ 책이 주장하는 결론은 간결합니다. ‘표정은 언어보다 빠르다’라는 거죠. 즉, 사람의 표정은 완전히 감출 수 없고, 아주 짧고 미세한 방식으로 새어 나온다는 걸 강조합니다.
특히, 애크먼은 사람의 얼굴에는 42개의 근육이 있으며, 이들 근육이 조합해 낼 수 있는 표정은 무려 1만 개가 넘는다고 했습니다. 이 가운데 3000개가 생활 속 감정과 관련이 깊다고도 했고요. 이후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감정으로 행복, 슬픔, 분노, 놀람, 공포, 혐오 등 6가지를 분류하기도 했습니다. 교육학에서는 이러한 정서 작용을 가리켜 ‘사회·정서 학습(Social and Emotional Learning)’이라고도 부릅니다.
양육 과정에서 자녀의 표정은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부모가 자녀의 기분과 정서를 이해하는 데 자녀의 표정만큼 쉽게 알아챌 수 있는 게 없죠. 하지만, 얼마 전 해외 저널에서는 ‘멍때리는 표정(Gen Z stare)’이라는 Z세대의 독특한 표정 문화가 등장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멍때리는 표정’은 감정 표현이 적고, 질문 후 반응이 늦으며, 눈만 뜬 채 가만히 있는 ‘얼굴 행동’을 말합니다. 아마도 부모라면 양육 과정에서 한 번쯤 “아이한테 말을 걸면 한참을 멍하니 쳐다만 봐요.”, “혼을 내도 표정이 없어요. 대꾸도 없고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라는 등의 하소연을 해본 적이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내 말에 집중을 안 하네”, “의욕이 없어”, “예의가 없는 거 아니야?”라며 혼자서 속을 태웠던 적도 있었을 테고요. 또, 그런 일이 반복될 때마다 부모는 자녀가 생각 자체를 안 하는 것 같아 불필요한 잔소리도 제법 했을 겁니다.
분명한 건, 학자들은 자녀가 멍때리는 상태를 ‘생각 없음’이 아니라 ‘생각이 너무 많음’으로 해석합니다. 아이들이 표정을 잃은 이유는 ‘표정을 조심하는 세대’이기 때문이죠. 학자들 사이에서 ‘멍때리는 표정’을 두고 자녀의 ‘태도’ 문제가 아니라 ‘뇌가 보내는 신호’의 문제라는 지적이 다수 의견입니다. 그러니까 요즘 자녀들의 뇌가 너무 바빠 지금 당장 표정으로 반응할 수 없는 상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요즘 아이들은 바빠도 너무 바쁩니다. 월급 받고 일하는 부모보다 더 바빠 보이죠. 일상에서 스마트폰 알림, 숏폼 영상, 게임, 채팅, 비교, 평가는 물론 기본적인 학업 일정까지 생각하면, 부모 세대와 비교했을 때 뇌를 써도 너무 많이 쓴다는 걸 주목해야 합니다.
‘멍때리는 표정’은 현상을 넘어 Z세대가 만든 문화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표정 하나도 평가 대상으로 여기고, 말 한마디가 기록으로 남는 환경에서 살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나 질문을 줬을 때 즉각적인 반응이 나오기란 쉽지 않습니다. ‘멍때리는 표정’이 문화가 된 원인에는 자녀 세대가 보이는 ‘무의식 행동’도 한몫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걸 심리학에서 말하는 ‘사고(思考)의 반응 속도’로 설명하면, 부모 세대의 경우 ‘생각하기 → 말하기 → 반응하기’의 과정을 보인다면, 요즘 자녀 세대는 ‘자극받기 → 처리하기 → 정리하기 → (멈추기) → 반응하기’라는 꽤 느린 반응 속도를 보입니다. 결국, 자녀가 멍한 표정을 짓는 건, 태도가 불량해서가 아니라 부모의 질문에 자녀가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부모가 ‘멍때리는 표정’ 문화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명료합니다. 자녀의 성장 과정에 꼭 필요한 ‘사회·정서적 학습’과 관련이 깊기 때문입니다. 이 학습은 이미 지난해부터 초·중고등학교에서 권장 프로그램으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자녀가 인간관계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표정을 감추면, 소통과 공감 능력을 갖추는 데 방해될 수 있고, 심지어 학교폭력과 같은 문제행동의 원인으로 작동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끼리 서로 표정을 읽지 못하면 시비와 폭력이 발생할 수밖에 없겠죠. 더구나 부모가 양육 과정에서 자녀를 오해하고 착각하는 상황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가 멍한 표정을 지을 때 “왜 그렇게 멍해?”, “정신 차려!”, “생각이 있긴 해?”라고 자녀를 몰아세울 게 아니라 “지금 생각 정리 중이구나”. “천천히 말해도 괜찮아”, “지금 바로 대답하지 않아도 돼”라고 자녀의 준비 속도를 늦추어 주면 오히려 자녀의 반응은 더 빨라질 수 있습니다.
무교(無敎)도 강력한 종교이듯이 애크먼은 ‘표정의 심리학’에서 “무표정도 강력한 표정이다”라고 했습니다. 무표정은 생각이나 감정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감정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선택’이고, 인간은 환경 변화에 따라 불안, 경계, 과부하, 평가 회피 상황에서 표정을 최소화하는 습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특히 사람의 경우 위협적인 환경일 때 경직된 표정을 짓고, 평가가 많은 환경일 때 무표정을 지으며, 안전한 환경일 때 표정을 다시 회복할 수 있다고 강조했죠. 자녀에게 적용하면 너무 와닿는 말이겠지요.
만일 자녀가 ‘멍때림’을 보인다면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무기력’보다 콘텐츠 과잉 등 자극 시대를 살아가는 자녀가 스스로 버티기 위해 선택한 ‘정지 기술’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또 부모는 자녀의 무표정을 마주했을 때 표정을 깨우려 하기보다 천천히 기다려 주는 태도도 중요하다는 걸 기억해 주시고요. 특히, 부모는 자녀가 멍한 표정을 지으면 이를 문제로 보기 전에 자녀가 보내는 ‘도움 요청 신호’라고 인식하고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표정’을 보여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완벽한 표정’이란 ‘팬암 미소(Pan-Am smile)’처럼 ‘억지 미소’가 아닌 ‘뒤센 미소(Duchenne smile)’처럼 진심이 담긴 ‘환한 미소’를 의미합니다.
[서민수의 우리 아이, 이슈&저널] 아이들은 왜 ‘멍때리는 표정’을 좋아할까요?
관련뉴스
- [서민수경찰관의 ‘요즘 자녀學’] 자녀의 ‘시간’에 부모의 ‘시간’을 더해 주세요
- [서민수경찰관의 ‘요즘 자녀學’] 추석이지만, ‘딥 페이크’ 이야기는 해야겠습니다
- [서민수경찰관의 ‘요즘 자녀學’] ‘스포츠’가 자녀의 스마트폰을 대체할 수 있다면
- [서민수경찰관의 ‘요즘 자녀學’] 부모님에게 ‘딥페이크 성범죄 주의보’를 발령합니다
- [서민수경찰관의 ‘요즘 자녀學’] 불편하지만, 부모가 꼭 알아야 하는 ‘실종’과 ‘유괴’ 예방법
- [서민수경찰관의 ‘요즘 자녀學’] 부모가 책을 읽으면, 자녀는 안전합니다
- [서민수경찰관의 ‘요즘 자녀學’] 비상 걸린 초등학생 ‘사이버 도박’
- [서민수경찰관의 ‘요즘 자녀學’] 자녀가 ‘스마트폰 금지법’을 잘 적응할 수 있을까?
Copyrightⓒ Chosunedu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