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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샛별학교의 첫날
샛별학교의 입학식, 처음 들어선 교실에는 설렘과 긴장이 교차하는 낯선 공기로 가득합니다. 책상 위에는 연필과 ‘입학 원서ʼ라고 쓰인 종이 한 장이 반듯하게 놓여 있습니다. 오랜만에 잡 아보는 연필이 어색한 듯, 어르신들의 손끝이 미묘하게 떨립니다.
고개를 약간 숙인 어르신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듯 하지만, 그 표정에는 기대 와 불안이 뒤섞여 있습니다. 그동안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던 “나도 배워보고 싶다ˮ는 바람이 현실이 되는 순간, 그들은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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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입학 원서를 작성해볼까요?ˮ
20대 대학생 교사가 밝은 목소리로 원서 작성하는 법을 안내합니다. 하지만 교실에는 갑자 기 묵직한 정적이 흐릅니다. 어르신들은 종이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굽니다. 긴장과 설렘이 뒤엉킨 끝에, 한 어르신이 한참을 망설이다 작은 목소리로 고백합니다.
“저… 사실 글씨를 몰라요.ˮ
그 말과 함께 교실 공기가 조금 흔들립니다. 고개를 더욱 떨구는 그 모습에 대학생 교사는 별 일 아니라는 듯 환하게 웃으며 말합니다.
“괜찮아요. 제가 같이 써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ˮ
그러자 종이를 쥔 채 멍하니 있던 다른 어르신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들기 시작합니다.
“저도 좀 도와주세요.ˮ
“저도… 이름부터 막히네요.ˮ
교실 한쪽에 일렬로 서서 기다리던 대학생 교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어르신들 곁으로 하나둘 다가갑니다. 무릎을 굽히고 책상 옆에 앉아 어르신들의 이름과 주소를 천천히 불러 적어줍니 다. 그리고 한 글자, 한 글자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발음을 알려줍니다. 어르신들의 손끝에 힘 이 들어가고, 얼굴에 어린아이 같은 쑥스러운 웃음이 번집니다.
◇ 배움을 미룰 수 밖에 없었던 세대
이 세대는 한글보다 먼저 생계를 배웠습니다. 한국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학교 대신 들판과 공장으로 내몰린 어린 시절.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며 쌀 한 톨을 아껴 가족의 끼니를 이어갔습니다. 산업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는 새벽부터 밤까지 공장에서 기계 소리에 파묻혀 귀가 먹먹해지도록 일했습니다. 연필 대신 연장을 잡고, 교실 대신 용광로 앞에 섰던 이들이 흘린 수많은 피와 땀을 머금고 오늘의 대한민국은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나라의 기둥을 세우느라 정작 자신의 꿈과 배움의 기회는 포기해야 했습니다. 누군가는 평생 그 한을 품고 살았고, 누군가는 사회 속에서 스스로를 작게 만들며 살아왔습 니다.
70대 김영수(가명) 어르신은 그때를 떠올리며 말했습니다. “중학교 입학 통지서를 손에 꼭 쥐고 집에 왔는데, 아버지가 그걸 찢어버렸어요. ‘공부는 있는 집 자식들이나 하는 거다, 넌 돈 벌어야 한다ʼ고….ˮ 그의 삶은 그렇게 공장에서 시작됐고, 어느새 두 아들을 대학에 보내고 손주를 돌보는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가방끈이 짧다ˮ는 말은 그들 삶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었습니다. 누군가는 모임에서, 병원 에서, 은행 창구 앞에서 스스로를 작아지게 만들던 그 말 때문에 더 이상 세상과의 연결을 시 도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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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마음속 작은 불씨는 꺼지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다시 배우고 싶다는, 이루지 못한 꿈을 향한 간절한 열망 말입니다. 샛별학교는 바로 그 불씨에 바람을 불어 넣는 공간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 속에서 빛나지만, 역사의 역설은 빛을 밝힌 이들이 정작 그 빛을 누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샛별학교에서 우리는 젊은 날 가족을 위해 자신의 배움을 미뤄야 했던 어르신들과 마주합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손에 연필이 쥐어지는 순간, 우리는 배움이 나이나 환경을 넘어, 삶을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힘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 배움이 선물해 준 새로운 시작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배움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ˮ
샛별학교에 다니는 어르신들은 이제 단순히 글을 읽고 쓰는 것을 넘어섰습니다. 처음에는 한 글 공부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집에만 있으면 안 되겠다는 마음으로 시니어 등하굣길 안전지킴이 일을 새로 시작하거나, 급식소 봉사에 참여하는 등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들이 하나둘 늘고 있습니다.
“원래는 별로 아픈 곳이 없어도 동네 병원에 가서 종일 앉아 있곤 했어요. 거기 가면 사람도 많고 커피도 주고 친구도 생기니까. 그런데 이제는 샛별학교에서 친구들을 매일 만나고 같이 공부도 하니 병원 갈 일이 줄었죠.ˮ
어르신들의 변화는 고립을 피하기 위해 병원을 ‘사회적 공간ʼ으로 삼아야 했던 삶에서, 진짜 관계가 생긴 삶으로의 전환을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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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을 부양하고 있는 자녀들도 달라졌습니다. “엄마가 이제는 혼자 문자도 보내고, 스마 트폰도 쓰시니 덜 걱정돼요. 예전에는 엄마가 집에 계실 때마다 혹시 적적하실까봐 직장에서 마음이 놓이지 않았거든요.ˮ
가족과의 소통이 늘어나고, 홀로 있던 시간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으로 채워지면서 어르 신들은 더 이상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 의자에 앉아 발끝만 보며 시간을 보내지 않습니다. 직접 생활비를 벌고, TV 자막을 스스로 읽고, 핸드폰으로 손주 사진을 받아보며, 세상과 자 연스럽게 이어지는 일상이 다시 시작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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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빚을 진 세대ʼ, 청년들이 놓아가는 연결의 사다리
샛별학교는 글과 공부를 가르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곳은 어르신을 비롯한 다양한 사 회 소외계층이 다시 세상과 연결되고, 관계 속에서 자신을 회복하며,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가는 출발점입니다.
배움은 지식을 채우는 일이 아니라, 고립을 깨고 사회 속에서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겠다
는 의지의 선언입니다. 누군가의 할머니, 누군가의 할아버지가 학생이 된 그 순간, 우리는 이 분들이 대한민국의 과거를 일군 사람들이자, 여전히 배움을 통해 미래를 만들어가는 존재라 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제 어르신들은 한글 교실을 넘어, 세상과 다시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변화의 여정에서,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이 세상과의 연결을 확장할 차례입니다.
[조수현의 두 번째 청춘을 시작합시다] 누군가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학생이 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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