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현의 두번째 청춘을 시작합시다] ‘인생 후반전’을 준비하는 이들의 두 번째 시작
조수현 사단법인 샛별학교 대표이사
기사입력 2025.06.18 09:00

- ‘늦은 배움’을 다시 시작하는 순간, 삶은 새로 쓰이기 시작합니다

  • 샛별학교 수업 현장.
    ▲ 샛별학교 수업 현장.

    “지금 배우면 뭐해요, 늦었죠.” 

    샛별학교에 처음 찾아온 어르신들 중 많은 분들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 말 뒤에는 ‘정말 배워도 될까?’라는 조심스러운 기대가 숨어 있습니다. 

  • 샛별학교는 ‘빚을 진 세대’로서 배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청년들이 교실의 불을 밝히는 청년 주도 민간 평생교육기관입니다. 학교 밖 청소년이었던 저의 개인적인 배움의 결핍에서 출발한 이 학교는, 어느덧 5년째 다양한 배경의 학습자들을 포용하는 지역 평생교육 플랫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르신, 이주민, 느린 학습자 등 각기 다른 삶의 궤적을 지닌 이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이곳에서 청년들은 ‘배움의 출발선은 나이나 국적이 아닌 필요와 의지’라는 철학을 양분 삼아 교육 기부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교육을 ‘젊은 세대’의 전유물처럼 여기지만, 사실 배움은 생애 전반에 걸쳐 계속돼야 할 삶의 기본권이기도 합니다. 시니어 교육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나 복지의 연장이 아니라, 삶의 존엄과 사회적 통합을 지켜내기 위한 공공의 책임이 돼야 합니다.

  • ◇ 배움을 멈춘다는 것의 의미

    2024년 한국은 전체 인구의 20% 이상이 65세를 초과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했습니다. (행정안전부, 2024). 평균 수명은 길어졌지만, 고령층의 삶의 질과 존엄은 여전히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습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끌었던 어르신들은 대부분 학업을 중단한 채 생계를 책임졌고, 그 결과 배움의 기회를 누리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2022년 기준 65~79세 고령자의 평생교육 참여율은 17.6%에 불과합니다(통계청). 이는 교육 기회가 특정 시기와 계층에 집중돼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단순한 개인 문제가 아닌,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제한하는 구조적 문제입니다.

  • 배움을 멈추면 삶의 선택지가 줄어듭니다. 스마트폰 사용법을 몰라 은행 업무를 포기하고, 정보를 읽지 못해 보건복지 혜택에서 배제되기도 합니다. 사회와의 연결이 끊기면, 고립과 불안은 더 깊어집니다. 하지만 배움을 다시 시작하는 순간, 연결은 회복됩니다.

    샛별학교에는 10대 후반부터 8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학습자들이 함께합니다. 특히 60대 이상의 만학도 어르신들이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이 나이에도 글을 배울 수 있을까요?”라고 조심스럽게 묻는 그 목소리는 단지 ‘늦깎이 학습자’라는 말로는 담기 어려운 존엄을 향한 실천의 시작입니다.

    한글 문해교육을 시작으로 검정고시에 도전해 고등학교 졸업장을 취득하고 대학교에 진학한 분. 오랜 세월 “가방끈이 짧다”는 말에 위축되었지만 스스로 그 한을 풀어낸 분. 손주에게 처음 쓴 손편지를 건네고 "그 아이의 웃음을 여생 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며 울컥하신 분. 이러한 배움의 장면은 단순한 기술 습득이 아니라, 삶을 다시 쓰기 시작하는 용기의 표현입니다.

    배움을 멈춘다는 것은 관계의 단절이며, 다시 배운다는 것은 세상과의 연결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배움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주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본질적인 활동이며, 시니어 교육은 복지가 아니라 회복적 권리이자 공적 책임입니다.

  • ◇ 시니어 교육은 복지인가, 권리인가

    한국의 시니어 교육은 여전히 ‘노인복지관 프로그램’이나 ‘여가 활동’으로 분류되며 정책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습니다. 제도는 존재하지만 실질적인 접근 기회는 제한적이고, 참여율도 낮습니다.

    반면 독일은 시니어 교육을 시민의 권리로 인식합니다. 이를 헌법적·제도적으로 보장하며 전역에 900개 이상의 ‘시민학교(Volkshochschule)’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노년층을 위한 실생활 밀착형 교육이 다양하게 제공됩니다. 대학에서도 ‘노인대학(Seniorenstudium)’ 제도를 통해 60세 이상 고령자에게 정규 강의 청강과 학위 과정 참여 기회를 열어두고 있습니다.

    2020년 기준, 독일 성인의 평생교육 참여율은 약 60%로 유럽 평균(45.1%)을 크게 웃돕니다. 고령층 역시 자아실현과 사회참여의 수단으로 배움을 이어가고 있으며, 학습이 일상의일부로 자연스럽게 통합돼 있습니다.

  • 독일 Volkshochschule Dresden의 외관. / 공식SNS.
    ▲ 독일 Volkshochschule Dresden의 외관. / 공식SNS.

    영국의 ‘제3세대 대학(U3A)’, 프랑스의 ‘Université du Troisième Âge’ 또한 시니어들이자발적으로 조직하거나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체계적인 학습 공동체입니다. 이들 국가는공통적으로 시니어 교육을 복지가 아닌 학습권으로 인식하고, 국가와 지역사회가 적극적으로 이를 뒷받침합니다.

    반면 한국의 시니어 학습자는 여전히 ‘배움이 늦은 사람’이라는 인식 속에서, 제도적 보호 없이 개별적인 용기만으로 교실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시니어 교육은 더 이상 선택적 복지가 아니라, 고령자의 삶의 질과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공공 인프라로 접근되어야 합니다.

    시니어 교육을 ‘권리’로 바라보면, 우리 모두는 어떤 존재로 나이 들어갈 수 있을까요?

    ◇ 우리는 모두 언젠가 시니어가 된다

    시니어는 특정한 소수집단이 아닙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도달하게 될 삶의 국면입니다. 샛별학교 교실에서 한글을 배우고, 스마트폰을 익히며 세상과 다시 연결되고 있는 이들은, 우리가 어떤 존재로 나이 들어갈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선배이자 거울입니다.

  • 샛별학교 수업 현장.
    ▲ 샛별학교 수업 현장.

    우리는 누구나 누군가의 자식이었고, 언젠가 누군가의 부모가 되거나, 돌봄이 필요한 존재가 됩니다. 배움은 세대를 이어주는 유산이자, 삶의 존엄을 지속하는 힘입니다. 

    한 학습자는 말했습니다. “딸이 키오스크 앞에서 버벅거리는 저를 보고 ‘엄마, 그냥 가만히있어’라고 했을 때, 세상에서 쓸모없는 존재가 된 기분이었어요.” 이 말은 시니어 교육이 기술 습득을 넘어서, 자존감과 사회적 존중을 회복하는 여정임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도 언젠가는 ‘배움의 두 번째 시작’을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시니어 교육은 고령층만의 과제가 아니라, 함께 늙어가는 사회가 서로의 미래를 책임지는 방식입니다. 시기를 막론하는 배움의 의지와 필요가 ‘늦은 배움’이 아닌 ‘자연스러운 권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우리는 지금 준비해야 합니다.

  • 우리는 모두 언젠가 시니어가 됩니다. 시니어 교육은 특정 세대만의 과제가 아니라, 미래의 나를 위한 투자이며, 세대 간 공존의 토대입니다. 배움의 기회를 제공받은 시니어는 더 건강하게 사회에 참여하고, 이는 결국 복지 지출 감소, 세대 간 소통 증진, 지역 공동체의 회복력강화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지금, 무엇을 바꿔야 우리가 함께 성숙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시니어 교육은 단순한 복지 서비스를 넘어, 사회 전체가 함께 배우고 성장하기 위한 공적 기반이어야 합니다. 고령사회에서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제 시니어 교육은 국가가 책임지고 추진해야 할 사회적 의무이자 모두의 권리입니다. 배움에서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사회, 나이 듦이 소외가 아닌 존중이 되는 사회.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시급한 사회적 약속일 것입니다. 

    샛별학교의 교실에 앉은 어르신들의 눈빛은 말합니다. “지금이야말로, 두 번째 청춘을 시작할 때”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