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후 강사의 과학 이야기] 분자 생물학의 발전
이승후 이투스 생명과학 강사
기사입력 2024.11.13 09:27

- 이승후 이투스 생명과학 강사가 알려주는 생명과학의 핵심!

  • 이승후 이투스 생명과학 강사.
    ▲ 이승후 이투스 생명과학 강사.

    ◇ 핵산의 재발견

    단백질에 비해 세포 내에 존재하는 핵산(nucleic acid)은 그 양이 매우 적어 순수하게 분리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따라서 핵산에 대한 연구는 단백질에 비해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가능하게 됐다. 

    1866년 멘델의 유전 법칙이 발표되고, 불과 3년 뒤인 1869년 핵산이 발견되었지만, 1940년대가 될 때까지 70여 년 동안 대부분의 과학자는 단백질이 유전물질일 것이라 생각했다. 단백질이 많은 생명 현상에 관여한다는 것이 밝혀진 데다, 생명체의 다양성과 세대를 걸쳐 일어나는 유전 현상을 고려했을 때 구조가 복잡하고 화학적으로 안정한 단백질이 유전 물질로서의 제격이라 생각한 것이다. 

    1910년 레빈이 DNA의 구조가 인산-당-염기로 이루어진 뉴클레오타이드의 단순 반복 결합 구조라는 것을 밝혀내자, 아이러니하게도 DNA가 유전물질로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 DNA가 유전물질이라는 것은 1944년 캐나다의 유전학자 에이버리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밝혀졌다. 그들은 1928년에 발견한 그리피스의 형질전환 원리를 시험관에서 재현해 형질전환의 원인 물질, 즉, 유전물질이 단백질이 아닌 DNA임을 밝혀냈다. 에이버리의 연구는 당시 단백질이 유선물질이라 믿고 있던 대다수 과학자의 생각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일부 과학자들은 DNA를 유전물질로 믿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는 DNA의 구조를 밝힌 왓슨과 크릭도 있었다. 모든 사람이 DNA가 유전물질이라고 믿게 만든 결정적 증거는 1952년 미국의 허시와 체이스에 의해 발표됐다. 그들은 T2라 불리는 박테리오파지에 방사성 동위 원소 표지를 다는 방법으로 DNA가 유전물질임을 증명했다. 

    ◇ DNA 분자 구조의 발견

    DNA가 유전물질임이 밝혀지자, 그 분자 구조를 밝히려는 연구 경쟁이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시작한 그룹은 로절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 1920~1958)과 모리스 윌킨스(Maurice Wilkins, 1916~2004)가 소속된 런던킹스칼리지의 생물물리학 연구 그룹이고, 케임브리지 대학 캐번디시 연구소의 크릭(Francis Crick, 1916~2004)과 왓슨(James Watson, 1928~ )이 2년 정도 뒤에 뛰어들었다. 

    허시와 체이스의 연구결과가 알려진 뒤, 미국 천재 화학자 폴링까지 경쟁에 참여하자 이들 사이에 20세기 과학사에서 다른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숨 막히는 연구 경쟁이 벌어졌다. DNA의 분자 구조를 밝히는 것은 유전 현상을 근원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여는 것이었기에 그것을 최초로 밝히는 과학자는 최고의 영광을 누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최종 승자는 왓슨과 크릭이었다. 이들은 1953년 과학잡지 ‘네이처’ 4월 25일 호에 DNA의 이중나선 구조와 그에 대한 설명을 담은 ‘핵산의 분자구조’라는 1쪽 분량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들은 이 논문의 말미에 자신들이 발견한 DNA의 분자모형이 유전물질의 복제 메커니즘을 설명할 수 있다고고 주장했다. 이는 20세기 생명과학 분야 최고의 사건이었다.

    이들의 연구법은 폴링이 단백질의 α-나선 구조를 밝힐 때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여러 가지 형태로 추론한 분자모형을 만들고, 그것들을 DNA의 X선 회절 사진 데이터와 비교하는 방식이었다. 이들이 사용한 X선 회절사진은 모리스 월킨스와 로절린드 프랭클린이 찍은 것들이었는데, 특히 프랭클린의 데이터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것이었다. ‘샤가프의 법칙’으로 이름을 날리던 샤가프를 직접 만나 의견을 교환한 것도 왓슨과 크릭이 올바른 분자모형을 만들 수 있는데 큰 영감을 주었다. 이렇듯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힌 것은 왓슨과 크릭의 번뜩이는 상상력과 집념의 결과물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노력만으로 이룰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 유전자 발현 메커니즘의 완성

    DNA 분자구조가 밝혀짐에 따라 이제 남은 과제는 ‘유전자 발현’의 메커니즘을 밝혀내는 것이었다. 그 문제를 푸는 데 걸린 시간은 10여 년에 불과했다. 왓슨과 크릭의 논문을 읽은 미국의 물리학자 가모프는 DNA에 있는 염기 세 개의 배열이 한 개의 아미노산을 결정하는 ‘디지털 코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담아 왓슨과 크릭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 영향을 받은 크릭은 1975년 DNA의 유전정보는 단백질로 전달되는데, 그사이에 RNA가 유전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며, 그 반대 방향의 정보 전달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중심원리(central dogma)’를 발표했다. 이 이론은 1964년 역전사 현상이 발견되면서 수정되기는 했지만, 1961년대 중반까지 분자유전학 발전의 방향타 역할을 했다. 중심원리가 발표되자 이 이론을 증명이라도 하듯 DNA 복제 과정, 전령 RNA(mRNA)와 전달 RNA(tRNA)의 존재와 역할, 유전 정보의 전사와 번역 메커니즘, 유전암호(genetic code) 등이 빠른 속도로 밝혀졌다. 이 중 유전암호의 해독 과정은 분자 생물학 분야가 얼마나 빠르게 발전했는지를 보여준다. 

    1961년 미국의 니런버그와 마테이가 RNA의 염기 순서 UUU(연속된 우라실) 가 아미노산 중 페닐알라닌에 해당한다는 것을 처음 밝힌 이후, 많은 과학자가 유전암호 해독에 경쟁력으로 참여하여, 불과 5년 만에 RAN의 모든 유전암호, 즉 64개 코돈(codon)의 해독이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연구 속도보다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지구상 거의 모든 생명체가 동일한 유전암호를 쓴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생물체의 기원이 같다는 것을 강력하게 입증하는 것이었다. 

    ◇ 분자 생물학 발전의 또 다른 배경

    20세기 생명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많은 물리학자와 화학자들이 생명과학 연구에 뛰어든 것도 한 가지 원인이었다. 파지 그룹의 창시자로 불리는 델브뤼크는 이론 물리학자였는데 유전 현상을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당시에 주로 쓰이던 초파리가 연구 대상으로 너무 복잡하다고 생각하고, 보다 단순한 박테리오파지를 선택했다. 이는 복잡한 연구 대상을 단순화시켜 그 속에서 핵심 원리를 찾는 물리학자들의 연구 방식이 생명과학에 접목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DNA의 분자 구조를 밝힌 크릭도 물리학자였다. 연구 방법뿐만 아니라 X선 회절 분석법, 동위원소 표지법, 초원심분리기, 크로마토그래피, 전기영동법 등 물리, 화학적 원리에 기반을 둔 새로운 실험 기구가 개발되고 사용되면서, 생명과학이 물리학과 화학처럼 실험 과학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DNA의 분자 구조가 밝혀지자, 본격적인 분자 생물학의 시대가 열리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