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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팩트풀니스>(안나 로슬링 뢴룬드, 김영사)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실제 통계자료를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 사실과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는 책이었다. 분명한 사실을 바탕으로 나의 빈약한 사고 체계를 조금씩 채워갈 때마다 짜릿함이 있었다. 정확히 확인된 사실은 늘 후련함과 명쾌함을 선물해 주는 것 같다.
한편 박성룡 시인의 <과목>라는 시가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과목에 과물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뿌리는 박질 붉은 황토에,
가지들은 한낱 비바람들 속에 출렁거렸으나 (중략)
과목에 과물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흔히 시를 잃고 저무는 한 해, 그 가을에도
나는 이 고목의 기적 앞에 시력을 회복한다.
*박질 : 메마른 성질이란 뜻으로 시인이 새로 만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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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산문으로 표현한다면 이런 문장이 될 것이다. '나무에 열매가 맺힌 것을 보니 놀랍다. 메마른 땅 위에 서서 비바람을 견뎠을 텐데, 결국 열매가 맺힌 것을 보니 정말 기적 같다'. 산문의 문장은 명확하고 지시적이지만 운문의 문장처럼 가슴에 울멍울멍한 감정의 덩어리를 생성해내진 못한다.
운문의 언어와 산문의 언어를 딱 잘라 구분할 순 없겠지만 편의를 위해 나누어 본다면 운문의 언어는 감성의 언어, 산문의 언어는 이성과 합리의 언어가 될 것이다. 그런데 감성만 건드리는 문장으로는 확신을 주지 못하고, 이성적이기만 한 문장으로는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실제로 과학 분야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책들을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과학적 사실과 함께 저자의 감성이 풍부히 드러나는 경우가 많고, 소설가들이 글쓰기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어 보면 수많은 논픽션 책들을 읽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설득 전략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필요한 요소로 파토스(감성), 로고스(이성, 논리), 에토스(화자의 인격)를 제시하였다. 어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이성과 감성, 그리고 인격이 함께 필요하다는 것을 2400년 전에 주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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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학생들은 비교적 ‘강점 본성’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감성이 풍부한 친구는 경험이나 관계, 감정에 관련된 주제를 편하게 여기고 이성이 발달한 친구는 사실 중심의 주제를 편안하게 대한다. 책을 고를 때도 문학 중심의 도서를 주로 고르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비문학 도서를 좋아하는 학생도 있다. 글을 쓸 때 ‘사실과 논리 중심으로 풀어가는지, 경험과 감정 중심으로 서술해 가는지’로 특징이 나누어지기도 한다(물론 이미 균형적인 태도를 가진 학생들도 있다). 이렇게 개인마다 가진 특성의 차이, 경험의 차이가 모두 개성으로 발휘되기 때문에 모든 글이 다르지만 모든 글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교사로서는 이왕이면 마음을 건드리는 문학의 떨림과 깊이도, 비문학을 통해 세상의 진실들을 하나둘씩 배우게 되는 겸허한 자세도 모두 느끼고 누리길 기대한다. 그래서 이성과 감성의 글, 산문의 언어와 운문의 언어를 함께 부릴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논리적인 언어가 익숙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논리적 강점을 기반에 두고 문학적 감성을 길러가면 좋을 것이고, 운문적 표현이 익숙한 사람이라면 아름다운 문장력을 기초로 하여 논리적 탄탄함을 자꾸 보완해 가면 좋을 것이다.
[리딩엠의 독서논술] 운문의 언어와 산문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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