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딩엠의 독서논술] 왜 ‘원고지 쓰기’를 해야 할까?
박혜진 ‘책읽기와 글쓰기 리딩엠’ 송파파크리오교육센터 원장
기사입력 2024.07.17 10:18
  • 쉬는 시간이 되면, 학생 앞에는 네모 세상이 펼쳐진다. 텅 빈 400개, 600개, 800개의 칸을 바라보며 말하는 대로 받아 적어주는 로봇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귀여운 투정을 내뱉는다. 원고지 성벽을 지키는 수문장의 대답도 완고하다. 그럼 말하는 사람이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다 틀려도 평생 그걸 바르게 쓰는 방법을 모르지 않겠냐고 한다. 적어주는 로봇은 점점 똑똑해질 거고, 불러주는 사람은 점점 바보가 될지도 모른다. 이때부터 교사와 학생의 불꽃 튀는 창의력 전쟁이 시작된다. 아이는 핸드폰이나 컴퓨터로 입력하고 싶다고 말하며, 어떤 방법으로 원고지에 글자를 수월하게 적을 수 있는지 각종 첨단 장비를 등장시킨다. 교사는 그 어마어마한 장비의 사용으로 인해 인간이 볼 손해 백만 개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렇게 2교시가 시작되고, 학생은 연필을, 교사는 첨삭용 펜을 손에 쥔다. 사실 이 문제의 정답은 ‘내 손으로 직접 원고지를 쓰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원고지는 전에 비해서 중요성이 떨어진 것처럼 느껴지지만 쓰임새가 풍부하다. 근래에 원고지는 한국어 교육 과정이나 필사, 글쓰기 결과물 제출, 시험 등 다양한 곳에서 사용된다. 

  • 박혜진 ‘책읽기와 글쓰기 리딩엠’ 송파파크리오교육센터 부원장.
    ▲ 박혜진 ‘책읽기와 글쓰기 리딩엠’ 송파파크리오교육센터 부원장.

    과거 원고지의 역사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로 올라간다. 1910년대 들어 원고지를 제작할 수 있게 되고, 1911~1914년경에 이르러 조선광문회에서 주시경과 김두봉 등의 주도로 자전(字典) 및 조선어사전의 편찬 작업이 진행된다. 조선어사전 소위 『말모이』의 편찬 작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권두연, 「신문관의 출판기획과 문화운동」,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2016, 287~303면) 조선어사전 이후 원고지는 점점 보편화되고 글을 쓰는 교재를 만들거나 신문, 잡지, 책 등을 발간하는 과정에서 널리 쓰인다.

    원고지를 사용하면 글의 구조가 눈에 들어온다. 글을 쓸 때는 개요를 사용하여 몇 문단으로 쓸 것인지, 어떤 내용이 들어갈지 밑그림을 그린다. 그 후 내가 하고 싶은 말에 살을 붙이고 스케치를 한다. 섬세함을 살리기 위해 문단이 바뀔 때마다 들여쓰기를 사용하고, 문단별 분량이 비슷한지 확인해 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문단은 키가 아주 크다. 밑그림을 그리고 스케치를 했지만, 막상 적어 보니 몇 줄 안 가서 소재가 동이 난 문단은 짧고 몽땅하다. 원고지에 쓰면 내 글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다. 이후 퇴고를 통해 손볼 곳을 보완하고 마침내 정성을 가득 담은 작품을 완성한다.

    원고지는 규칙과 질서, 자유로움이 공존한다. 그뿐만 아니라 내 글씨가 어떻게 생겼는지 요목조목 따져볼 수 있다. 음절로 나눈 내 글씨체는 자음과 모음의 비율이 맞는지, 글씨를 쓰는 필압을 어떻게 정돈할 수 있을지 연구해 볼 수 있다. 줄글로 쓸 때는 오르막길 내리막길 요동치던 글자를 칸 안에서 얌전하게 만들 수 있어 나름의 질서와 체계를 잡게 된다. 숫자를 쓰거나 단위 기호, 알파벳 소문자, 문단 부호가 알콩달콩 둘이 한 칸을 쓰는 정다운 모습도 볼 수 있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원고지 쓰기에는 ‘교정부호’라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 순간의 느낌으로 적은 글을 다시 읽었을 때 아쉬움이 남았다면 교정부호를 사용하여 마음껏 수정할 수 있다. 

  • 필자도 대부분 업무를 핸드폰이나 컴퓨터로 하지만 ‘원고지’ 감을 잃지 않기 위하여 종종 학생과 함께 원고지를 작성한다. 원고지에 글을 쓰면 쓸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집중해서 네모 칸이 가득했던 종이 한가득 내 글씨를 새겨넣으면 아주 짜릿하다. 다 큰 어른이 쓰더라도 800자를 가득 채우면 팔이 뻐근해질 때가 있다. 글씨를 쓰는 동안 손목은 손과 팔을 적절하게 지지하기 위해 중립 자세나 약간 신전 된 자세를 유지하고, 상지의 안정성과 가동성에 관련한다. 근력은 필기구를 꽉 잡고 위치를 일관성이 있게 유지하는 능력에 영향을 미친다. 잡는 힘은 처음 3개의 손가락을 사용하여 필기구를 손안에 고정하기 위해 필요하다. (장철, 김명진, 유영민, 이향진, 이혜진, 「글씨쓰기 훈련과 근력 훈련이 비우세손 기능과 근력에 미치는 영향」, 대한통합의학회지, 1(2), 2013, pp.23-35) 글을 쓰는 것은 뇌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종이 위에서 연필을 쥐고 근력 운동을 하는 셈이다.

    학령기 아동이 익힌 기본기는 쌓여서 크게 한 걸음 내딛기 위한 자양분이 된다. 오랜 역사를 지닌 원고지 쓰기도 마찬가지다. 옛날 옛적에 쓰던 고리타분한 방식이 아닌 기반을 다지는 수행을 쌓는 것이다. 원고지 쓰기는 20세기에도 21세기에도 필요하다. 글씨를 다듬어 보고, 문장과 문장을 이어 긴 글을 구성하며, 다 쓴 글을 수정해 보기까지 글을 읽고 쓰는 전체 흐름을 원고지라는 수행 체제로 확인할 수 있다. 이 과정이 능숙해진 학생은 두 번째 장으로 넘어가 또 다른 800개의 네모 칸이 가득한 종이를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800자, 1600자를 해낼 기본기가 다져졌는데, 무엇이 두려우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