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딩엠의 독서논술] 일기장에 써 내려가는 21세기 화전가
박혜진 ‘책읽기와 글쓰기 리딩엠’ 송파 파크리오 교육센터 부원장
기사입력 2024.05.08 09:00
  • 올해 봄에는 비가 자주 왔다. 식물의 한살이를 살펴보면 꽃봉오리일 때 수분 공급이 좋을수록 꽃은 풍성해진다. 이번 봄이 딱 그랬다. 매화도 벚꽃도 말 그대로 흐드러지게 폈다. 봄을 알리는 개나리와 진달래, 벚꽃은 보통 1~2주의 기간을 두고 만개했으나 이번에는 느긋한 개나리와 성격 급한 벚꽃이 한자리에서 함께 만개하기도 했다. 비가 온 후 깨끗하게 갠 하늘과 벚꽃, 개나리를 함께 보고 있노라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일주일 후 벚꽃은 순식간에 지고 질세라 겹벚꽃과 꽃사과, 철쭉, 연산홍, 자산홍이 만개했다. 바글바글한 꽃놀이 인파를 보고 있으면 봄이 왔다는 설렘과 함께 우리나라는 늘 ‘열심 민족’이라 꽃놀이에도 열정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 박혜진 ‘책읽기와 글쓰기 리딩엠’ 송파 파크리오 교육센터 부원장.
    ▲ 박혜진 ‘책읽기와 글쓰기 리딩엠’ 송파 파크리오 교육센터 부원장.

    옛날부터 우리 민족이 꽃놀이를 진심으로 대했다는 것은 증거도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살펴보면 음력 3월 중순경에 꽃놀이를 위해 교외나 야산 등지에서 화전놀이를 소재로 한 규방가사 ‘화전가(花煎歌)’가 나온다. 이는 화류가(花柳街)·화수가(花樹歌)·낙유가(樂遊歌) 등으로도 불린다. 여인들은 준비해 간 음식과 진달래 꽃전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지필묵으로 현장에서 창작, 윤작, 독송, 윤송 등의 규방 가사로 가회를 열었다. 현장에서 짓기도 하고 미리 지어 오거나 화전놀이가 끝난 뒤 집에 돌아와 그날 하루를 돌이키며 감회를 글로 남기기도 한다. 내용은 대개 봄을 맞아 화전놀이를 준비하는 과정으로부터 시작해서 화전장에서 하루를 즐기는 모습, 하산해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과 집에 도착한 뒤의 감회까지 모든 과정을 상세하게 그린다. 지금의 일기와 형태가 유사하다.

    이번 봄에도 21세기 화전가를 써보는 건 어떨까? 꽃놀이하러 가기 위해서 집에서 준비하고 꽃을 보며 하루를 즐기는 모습,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과 집에 도착한 뒤의 감회로 이어지면 일기 한 편은 금방 완성된다. 다만 단순한 타임라인을 나열하기보다는 내 생각과 느낌을 정성스레 연결해볼수록 내용은 좋아진다. 스쳐 지나가는 찰나가 10년, 20년 뒤에도 눈앞에 훤한 특별한 순간이 되는 것은 기억 중추 혼자 담당하는 것이 아니다. 감정과 표현, 손끝의 기록 삼박자가 맞아떨어지면 더 찬란한 오케스트라 연주가 시작된다.

  • 학생을 지도하다 보면 아이가 언제, 어디에 갔고, 뭘 했고, 뭘 봤고, 뭘 먹었다는 내용을 되풀이해서 고민인 경우가 많다. 그 뒤에는 으레 다음에도 또 했으면 좋겠다는 마무리가 연결된다. 같은 시간을 보낸 한 학급의 아이들에게 일기를 써보자고 하면 일기 공장이 가동된다. 언제 어디로 모였고 무엇을 했고 재미있었다는 글 덩어리가 완성된다. 상의해서 적은 것도 아닌데 문장 구조와 디테일만 다를 뿐 똑같은 이야기가 되풀이되고 있다.

    필자도 아직 일기를 쓰고 있는데, 숙제가 아닌 자의로 쓰게 된 시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하루하루 칸이 그려져 있고, 동일하게 나눠진 다이어리를 썼다. 과거의 나는 어리석었다. 지금은 무지 다이어리를 사용한다. 무늬가 없이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점만 찍혀있으니, 내 생각을 내 마음대로 제련할 수 있다. 분량에 구애받지 않아야 한다. 스티커로 가득 채우고 시처럼 짧은 한 줄로 표현하는 날도 있다. 할 말이 많은 날에는 두 장, 세 장도 모자란다. 틀이 그려져 있어도 그 틀을 깰 수 있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또한, 일기를 쓸 때는 세심하게 나의 감정을 들여다보면서, 담백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그대로 옮기기 위해 구구절절 적다 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하다가 이런 이야기까지 왔는지 의문이 생기게 된다. 생각은 깊이, 표현은 담백하게 했을 때 내가 쓰고 내가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나의 기록 유산이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