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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5일 국가직과 지방직 공무원시험이 일제히 치러졌다. 시험이 끝난 뒤 ‘공시생’(공무원시험 수험생)의 표정은 엇갈렸다. 가채점 결과 합격에 기대를 걸어볼 만한 점수를 얻은 공시생은 이미 면접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반면 그렇지 못한 공시생은 허탈한 표정으로 다음 시험을 준비하거나, 아예 수험생활을 접는 것도 고려하는 모습이다.
“더는 돈이 없어서 버틸 여력이 없어요.” 27일 오후 노량진 한 독서실을 벗어난 박현임(29)씨는 기자와 만나 이렇게 털어놨다. 2016년 6월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시작과 함께 공시생의 길로 접어든 박씨는 현재 3개의 단과강좌를 듣고 있다. 한 달 수강료만 약 100만원. 여기에 40만원 상당의 숙박비와 식비, 교재비 등이 든다. 한 달에만 200만원 가까이 쓰는 생활을 3년여간 해온 셈이다. 2년을 넘긴 지난해부터 박씨는 지독한 자괴감까지 느꼈다. 박씨는 “기업에 입사해 자리를 잡은 친구도 있고, 다른 친구들도 어떻게든 앞가림을 하고 있다”며 “적성에 대한 고민이나 치열한 경쟁이 두려워 공무원시험을 본다고 도피하는 건 아닌지 회의감이 든다”고 말했다. 박씨는 이번 필기시험 결과에 따라 노량진을 떠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날 노량진에서 만난 공시생은 대부분 준비기간 4년차에 접어들면서 극심한 슬럼프를 겪었다. 강호진(28)씨는 “1년차는 떨어져도 이제 시작이라며 공부에 매진할 수 있고, 2년차가 되면 다음번엔 붙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희망을 품는다”며 “그러나 세 번이나 떨어진 뒤에는 이게 과연 내 길이 맞나 싶은 고민에 휩싸인다”고 설명했다. 강씨는 이어 “공무원이 적성에 맞아서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며 “그저 직업적 안정성을 보고 도전하는 것인데 자꾸 떨어지다 보면 인생을 허비한다는 기분을 떨치기 어렵다”고 말했다. 강씨는 이번 시험마저 떨어지면 수험생활을 정리할 계획이라고 털어놨다.
오랜 수험생활 끝에 시험에 합격한 공시생의 ‘성공담’은 이들이 또다시 시험에 도전하게 하는 달콤한 유혹이다. 우나리(25)씨는 “오랜 수험생활을 딛고 시험에 합격한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을 품게 된다”며 “합격점수와 큰 차이도 나지 않다 보니 포기가 쉽지 않다” 고 털어놨다. 우씨는 이를 일종의 중독현상이라고 표현했다. 우씨는 대학교 입학을 포기하고 수험생활을 택한 6년차 공시생이다. -
◇ 10명 중 3명은 “민간 취업 원해”
이처럼 시험합격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공시생 일부는 기업 취업을 도전하고 싶어한다. 지난해 서울산업진흥원이 공시생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30.6%가 공무원시험을 그만두고 기업으로 진로를 변경하고 싶다고 응답했다. 특히 30대에 접어든 공시생의 비율(32%)과 2년 이상 공시생(34.2%)의 비율이 높았다.
그렇지만 기업으로의 진로 전환도 녹록지 않다. 공시생 스스로도 어려움이 클 것으로 전망했다. 같은 설문조사에서 전체 응답자 가운데 37.8%는 진로 변경 시 경쟁력이 없다고 답했다. 수험생활이 민간기업 취업에 걸림돌이 됐다는 인식이 큰 셈이다. 특히 인턴십 등 기업 실무를 경험한 바가 없고(34.7%), 자신감·도전의식이 부족(25.4%)하다는 응답이 높게 나타났다. 기업의 직무지식(19.3%)과 인적 네트워크(14.2%)가 부족하다는 응답도 있었다.
실제 이들이 수험생활을 하는 동안 다른 구직자와의 ‘취업역량’ 격차는 커진다. 이른바 ‘스펙’이 턱없이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민간기업 구직자들이 영어점수를 만들고, 취업을 위해 각종 공모전에 참여하거나 수상실적을 쌓는 동안 격차가 크게 벌어진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토익이나 토플 등 영어점수를 만드는 기간만 적어도 6개월여는 필요하다는 게 공시생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취업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교육과정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어했다. 59.1%가 참가 의사를 밝혔다. 직무 분야별 기초실무역량(64.4%), 문제 분석·해결 능력(45%), 대인관계·비즈니스 매너(33.3%), 의사소통 능력(30.4%) 등의 교육을 원했다.
◇ 공시생 적체, 사회적 비용 손실 22조
사회적으로도 이들의 기업 진로 전환은 시급한 상황이다. 매년 공시생 규모가 크게 늘고 있어 적체현상을 빚고 있다. 지난해 한국국정관리학회의 한 연구에 따르면 국내 공시생 인구는 44만명에 달했다. 청년인구(만20세~29세)의 6.8%에 달하는 규모다. 게다가 지난 2017년 현대경제연구원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2017년 당시 공시생이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기회비용 손실은 21조7689억원에 달했다. 당시 연구에선 공시생 규모를 25만7000명으로, 공시생 1인당 연간 지출액을 1800만원으로 상정했다. 오준범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현재 공시생 규모와 물가 등을 고려하면 기회비용 손실액이 훨씬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공시생의 기업 진로 전환을 지원하는 기관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지난해 설문조사를 진행한 서울산업진흥원과 노량진이 위치한 동작구청 정도가 유일하다. 특히 동작구청은 올해 공시생의 진로 전환을 지원하기 위해 4월부터 청년일자리센터(센터)를 열고 공시생 멘토링 등을 진행하고 있다. 4월 1000명 수준이던 이용자 수는 5월 2200명으로 급등했다. 하루에만 100여명 이상의 공시생이 센터를 찾고 있고, 6월 필기시험이 끝난 뒤 상담 사례가 더 증가하는 추세다.
센터는 찾아오는 공시생을 위해 취업상담과 훈련 등을 병행하고 있다. 공시생 생활을 경험한 뒤 기업으로 진로를 변경한 이들을 상담사로 채용해 공시생의 실제 어려움을 듣고 조언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곳에서 상담사로 일하는 김대찬(35)씨는 “2년 반 동안 세무 관련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다 포기하고 취업을 택했다”며 “수험생활을 하다 기업에 취업하려면 갖춰진 게 없어 경쟁이 어렵다 보니 취업에 유리한 자격증을 취득하는 방향으로 안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공무원시험을 포기하고 기업 취업을 생각할 당시엔 이런 제도나 센터가 없어 어려움을 겪어 공시생의 고민을 잘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산수 센터 총괄매니저는 “상담을 하다 보면 눈물을 보이는 공시생도 간혹 있다”며 “사회문제가 된 청년 실업과 공시생 적체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거주지에 상관없이 모든 청년이 센터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 공시생 눈높이 낮추고 사회도 지원해야
전문가들은 공시생의 기업 진로 전환을 위한 지원이 더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서울산업진흥원 관계자는 “기업 취업을 원하는 공시생은 재벌·대기업 취업보다 중소기업 취업을 선호한다”며 “원하는 연봉수준도 중소기업과 크게 다르지 않아 적극적인 전환 교육을 실시하고 취업설명회 등을 개최한다면 적체현상을 빚는 공시생 상당수가 기업 취업을 선택할 여지가 크다”고 분석했다.
취업역량을 쌓기 위한 지원도 필요하다. 하 총괄매니저는 “공시생이 선뜻 기업 취업을 준비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떤 역량을 쌓아야 취업할 수 있을지 탐색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며 “막연히 영어점수를 준비해야 한다는 점 정도만 고민하고 있을 뿐 실무역량을 어떻게 쌓을지, 어떤 진로를 택할지 어려움을 호소한다”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공시생이 적성을 찾고 실무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인턴십을 지원하는 정책 도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대학의 관련 기구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고용노동부가 청년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벌이고 있는 대학일자리사업이다. 전국 대학 105곳에 설치된 대학일자리센터는 기존 재학생을 대상으로 한 취업상담에서 졸업생까지 범위를 넓힌 만큼 공시생도 상담을 받을 수 있다. 주로 해당 대학의 졸업생이 상담을 받을 수 있지만 일부 대형 일자리센터는 지역의 청년들이 모두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대학 졸업생도 상담이 가능하다.
이석각 전국대학교 취업관리자협의회 사무국장(한림대 취업지원본부 팀장)은 “기업 입장에서 공시생은 나이가 많고 취업역량이 부족해 채용을 꺼리는 편”이라며 “눈높이를 낮추고 취업역량을 기르기 위해 우선 대학의 일자리센터를 통해 진로를 다시 설정하고 정부의 각종 취업지원 프로그램을 착실히 이수하는 인내심과 자세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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