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상의 입시 속 의미 찾기] 영화 ‘사일런스’에서 신은 침묵하지 않았다
조선에듀
기사입력 2017.03.20 09:37
  • 안녕하세요. 신진상입니다. 이번에는 최근에 개봉된 영화 중에서 학생과 학부모가 함께 보면 좋은 영화 한 편에 대한 리뷰를 원작 소설과 비교해가며 들려드리겠습니다.

    1942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지난 99년 타계한 스탠리 큐브릭 감독과 함께 미국 출신 세계 최고의 영화 감독으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모든 영화들이 영화사에 남을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지요. 스콜세지 감독은 다큐멘터리와 영화를 넘나들며 ‘성난 황소’, ‘갱스 오브 뉴욕’, ‘좋은 친구들’ 등의 주옥같은 걸작들을 만들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유명 원작 소설의 영화화에 도전한 사례는 많지 않은데 1993년에 이디스 워튼의 소설 ‘순수의 시대’ 이후 실로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88년에는 그리스의 대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예수의 마지막 유혹’을 연출했습니다. 지난 2월28일 극장가에 개봉한 ‘사일런스’의 원작 소설도 그 때 읽었다고 합니다.

    ‘사일런스’의 원작 소설을 쓴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엔도 슈사쿠는 노벨 문학상 후보로도 여러 차례 거론되었고 국내에서도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를 비롯해 많은 작가들과 작품에 영향을 미친 일본의 대표적인 크리스찬 소설가입니다. 영화 개봉 전에 열린 시사회에서는 팬인 공지영 작가가 패널로 참석해 작품에 관한 토론을 하기도 했습니다. 66년에 발표된 ‘침묵’은 그의 대표작이자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인류 역사 상 최고의 종교 소설이라고 표현했던 문제작입니다. 이노우에 심문관과 주인공 로드리게스 신부의 열띤 신학 논쟁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5장인 대심문관 못지않은 긴장감과 흡인력으로 서구 종교학자들과 문학 평론가들을 흥분시킨 바 있습니다.    

    저는 대학 시절 원작을 워낙 감동적으로 읽었고 학생들과 수업도 여러 차례 해본 바 있어서 세세한 내용까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종교학과 철학과 심리학과 일어일문학과 국어국문학과 지원자들에게 주로 권했습니다. 대학 시절 이 작품을 처음 읽으면서 훗날 어떤 감독이 영화할지는 모르지만 배교와 고해 성사를 반복하는 기치지로의 슬픈 표정. 로드리게스 신부의 내면, 그리고 이노우에와 로드리게스의 치열한 논리 대결 등이 어떻게 영상화될지 궁금했습니다. 제가 영화감독이 되어서 나라면 이렇게 연출할 거야 라며 메가폰을 드는 장면을 상상하곤 했습니다. 이런 식이었죠. “물에 빠진 신도들을 구하기 위해서 같이 물 속에 뛰어들어 파도의 제물이 되는 가루프 신부의 죽음은 어떻게 그릴까?” 신부를 삼킨 파도와 바다는 전과 후가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거든요. 그 순간 로드르게스 신부는 절규합니다. “신이시여! 당신은 정말 존재하시는 겁니까?” 이런 장면들이 소설에서는 상상력을 자극하며 너무나 자연스럽게 넘어가는데 영화로는 구현하기 무척 어려운 경우입니다. 그래서 일본 감독이든 서구 감독이든 영화화가 쉽지는 않을 거라는 전망은 했습니다. 실제 관념 소설은 영화화가 정말 힘듭니다. 대표적으로 밀란 쿤데라의 소설들, 수시로 개입하는 작가의 목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심리와 성격 때문이죠. 카메라는 인간의 머릿 속을 보여주기가 그만큼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미 29년 전 ‘예수의 마지막 유혹’을 찍어 보았고 이탈리아 이민 출신으로 모태적으로 가톨릭 신앙인인 마틴 스콜세지는 엔도 슈사쿠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정확히 읽은 듯 합니다. 아마 원작 소설을 여러 번 읽었기 때문이겠지요. 감독은 영화하기 전 원작 소설을 반복적으로 읽으며 버릴 것과 취할 것 더할 것을 머리 속에서 계산합니다. 마틴 스콜세지는 원작에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했고 무엇을 더했을까요? 그 것을 알기 위해서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일본 천주교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 때 가혹했던 기독교 탄압에 대해서 맥락을 알고 보면 더욱 더 재미가 있습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기독교(개신교와 천주교를 합쳐서 모두 기독교로 표현하겠습니다.)의 역사가 깁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일본 장군 중에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시 일본군 선봉장이었는데 이 사람이 대표적인 교인이었습니다. 이 사람 외에도 몇 명의 다이묘가 더 있었고 한 때 신자 수가 30만 명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포르투칼인으로부터 조총을 얻은 오다 노부나가와 그 부하 출신으로 일본을 천하통일한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은 서양으로부터 빚진 게 있어서 기독교를 노골적으로 탄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소서행장 외에 여러 명의 다이표가 풍신수길을 도와 임진왜란에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2인자로서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았던 다이묘 덕천가강(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기독교와 기독교 세력을 불신하며 두려워했습니다. 마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그의 어린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반란을 꾀하던 그는 소서행장을 포함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들을 세기가하라 전투에서 물리친 뒤 일본을 접수합니다. 쇄국정책을 펴면서 기독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합니다.

    영화의 배경은 1640년 경으로 드러내놓고 크리스찬(일본식 영어로 키리스탄)을 선언했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도쿠가와 막부는 키리스탄인지 아닌지를 입증하기 위해 성모마리아가 예수님을 안고 있는 성화를 밟고 지나가도록 하는 ‘후미에(일본어로 그림 밟기라는 뜻)’ 의식을 강요했습니다. 믿음과 함께 순교할 것인가, 믿음을 공식적으로 버리고 배교를 선택하며 삶을 이어갈 것이냐를 선택하는 고통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신도 뿐 아니라 신부에게도 똑 같은 후미에가 강요되었습니다.

    작품 속에서는 세 명의 포르투칼 신부가 등장하는데 그 중에 한 신부는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수장 당하는 일본인 신도들을 구하러 바다에 뛰어들어 죽음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나머지 두 사람은 고통 받는 다른 일본인 신도들을 살리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후미에 즉 공개적인 배교를 선택합니다. 거듭되는 신도들의 죽음 앞에서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의심했던 주인공 로드리게스 신부는 순교의 길을 선택하려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내면에서 듣습니다. “나를 밟고 지나가라. 나를 밟는 네 발이 아플 것이니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목소리였습니다. 배교를 선택한 로드리게스 신부나 페레리아 신부는 목숨이 아까워서 후미에를 한 것은 아니었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이 역설적으로 배교였고 이를 통해 다른 신도들을 살린 이타적 행위였던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원작에서 취한 겁니다. 시간 순서가 약간 다를 뿐 영화 진행과 원작의 진행은 거의 일치합니다. 그렇다면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버린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노우에 심문관과 로드리게스 신부의 기나 긴 논쟁입니다. 이게 소설의 하이라이트인데 영화에서는 너무 간략하게 그려졌습니다. 이노우에 심문관보다는 통역관으로 등장한 아사노 타다노부의 비중이 더 크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마치 중간 과정은 건너뛰고 시작과 끝만 보여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이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능력의 한계라기보다는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제한된 시간(142분이라는 다소 긴 시간이죠) 안에 원작과 원작에 대한 감독의 새로운 해석을 동시에 보려주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소설도 아니고 연극도 아닙니다. 그리고 방송 드라마도 아닙니다. 2시간 안에 보여줄 수 없으면 생략하라(2시간이 관객들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는 원칙이지요. 연극이라면 가능합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계속해서 주고 받는 대사가 이어진다면 관객들은 피곤함을 느낄 겁니다. 

    이제 스콜세지 감독이 더한 것, 즉 엔도 슈사쿠의 생각에 덧붙여진 마틴 스콜세지의 생각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지금까지 내용을 정리해볼까요. 일단 마틴 스쿨세지가 동의한 엔도 슈사쿠의 생각. 즉 의견일치를 본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독교 신의 본질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이다, 믿음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숨겨져 있는 것이라는 말. 신의 침묵은 신이 없다는 증거가 아니라 신이 내 마음 속에 있는 증거다.”

    마틴 스콜세지는 서양인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가톨릭의 강한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 이민의 후손입니다. 서양인인 감독은 일본과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 엔도 슈사쿠에게서 무엇이 궁금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일본이 서양 그 어떤 나라보다 근대화에 성공했는데 기독교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일본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근대화했기 때문일까요? 우리의 전통을 너무나 빨리 버리고 서양의 정신 즉 기독교를 너무 빨리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근대화를 주체적으로 이루어내면서 서구의 정신 즉 기독교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전 국민의 1%도 되지 않을 정도로 서양의 신은 일본에서 처절하게 패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서구 지식인들의 논쟁사를 다룬 ‘50년 간의 논쟁’이라는 다큐를 찍을 정도로 지성적인 감독 마틴 스콜세지는 당연히 이게 궁금했겠지요.

    그래서 영화는 원작보다 에필로그의 해석에 긴 시간과 의미를 부여합니다.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기치지로의 죽음과 일본인 아내를 얻고 일본 불교를 믿으며 철저하게 일본인으로 살아간 로드리게스 신부의 노년과 죽음은 엔도 슈사쿠의 의도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마틴 스콜세지가 하고 싶은 말을 충실하게 잘 전했습니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 불교 장례식으로 치러진 로드리게스 신부의 장례식에서 카메라는 로드리게스 신부의 손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포교 초기 신도가 깎아준 삭은 십자가였습니다. 물론 이 십자가 하나만으로 마음 속으로는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다고 단정짓기는 어려우나 불교로 개종한 이후에도 마음 속에 어는 순간에는 자신이 전에 믿던 하나님이 존재했음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일본성, 일본의 근대화의 특징을 읽었습니다. 그것은 서양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일본과 일본의 힘이기도 했습니다. 경영학의 신이라 불리는 피터 드러커가 말한 일본 근대화의 본질과도 상통합니다. 일본의 근대화는 일본이 서양을 그대로 따라간 일본의 서양화가 아니었습니다. 서양이 일본으로 변화하는 서양의 일본화였습니다. 서양도 완벽하게 존재하면서 일본도 완벽하게 존재합니다. 어느 한 쪽이 어느 한 쪽을 지배하거나 지배당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이야기죠. 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영화 속에는 정말 다양한 방법의 고문이 등장합니다. 물론 로마 시대 때도 그에 못지않은 기독교인에 대한 고문이 있었지요. 그러나 로마는 결국 기독교에 의해 정복되었습니다. 일본이 로마처럼 기독교 국가가 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다이니치로 대변되는 그들 자신의 전통적 가치관에 대한 믿음과 사랑도 강했기 때문입니다. 이노우에는 너무나 자신 있게 이야기합니다.

    “믿음 좋다. 그러나 그 믿음은 스페인 네덜란드 잉글랜드 포르투갈의 것이다. 그곳에 맞다고 일본에서도 그 믿음이 꼭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일본이 기독교 국가가 되지 않은 이유는 불교라는 대안 종교가 있었기 때문만도 아니고 무자비한 탄압이 지속되었기 때문도 아니었던 거죠. 보편적으로는 타당하고 좋은 종교일지 모르지만 일본과 일본 사람들에게 맞고 더 필요한 것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학생과 했던 수업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종교 유무에 관계 없이 학생들은 기치지로라는 캐릭터에 특히 끌리더군요. 한 학생 글을 소개할까 합니다. 

    “유다에 비유될 만큼 믿음이 약한 기치지로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저는 인간에 대한 제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실제 대다수 인간들은 그 상황이 주어지면 원초적인 생존 욕구와 신앙심이 맞서 싸웠을 것이고 대부분 기치지로처럼 행동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 자신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양면적인 존재입니다. 어떤 인간과 어떤 종교 어떤 국가도 하나의 이념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맹목적인 신앙심을 가진 사람에게도 생존 욕구가 있습니다. 반대도 성립합니다. 신앙심과 동시에 신에 대한 회의와 의심, 자기 보존의 욕구가 합쳐진 모습이 인간입니다. 기치지로를 포함해 로드리게스 신부까지 이 작품 속에서 드러난 모든 인간들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을 빌리면 끊임없이 유동하는 존재입니다. 

    만약에 인간에게 종교가 필요하다면 교회 성당 사찰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따뜻한 친구 같은 존재로서 신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 마틴 스콜세지와 엔도 슈사쿠의 열혈 팬인 신진상이 이 영화와 소설을 보고 내린 결론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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