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 깡패’들의 좌충우돌 성장기
김세영 조선에듀 기자
기사입력 2016.08.01 11:30
  • 명문대 간판이 취업을 보장해주지 않는 시대다. 2014년 서울대·연세대·고려대의 인문·사회계열 졸업생 세 명 중 한 명이 직장을 못 구했다는 통계가 있다. 취업에 성공했다고 해서 ‘꽃길’이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대졸 신입 사원 네 명 중 한 명이 취업 후 1년 이내에 퇴사한다. 직무 적응 실패가 가장 큰 원인으로 꼽혔다. 명문대 졸업장도, 대기업 취업도 행복을 보장하는 ‘절대 반지’가 아니라는 얘기다. 명문고·명문대를 졸업하고 남들 다 가는 길을 거부하며 나름의 행복을 찾아가고 있는 두 사람을 만났다. 이들은 “공부는 잘했지만 꿈이 무엇인지 몰라 뺑뺑 돌고 돌아 이제야 ‘나만의 길’을 가는 중”이라고 했다.

    정현지Ⅰ“진로는 주관식일자리 직접 만들어야”

  • 정현지 드림유니버시티 대표./ 김종연 기자
    ▲ 정현지 드림유니버시티 대표./ 김종연 기자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로 강의를 하는 정현지(27) 드림유니버시티 대표는 서울과학고를 나와 연세대에서 경영학과 및 아동가족학을 복수 전공했다. 지금은 서울대 경영대학원에 다니고 있다. 일견 완벽한 듯한 그의 학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20세부터 4년의 공백이 있다. 방황은 서울과학고를 졸업하면서 시작됐다. “의사가 되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공부하다가 첫 대학 입시에 실패했어요. 그것만 보고 달렸는데 앞이 캄캄했죠. 걱정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런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차피 대학에 떨어졌으니 다른 길로 한번 가보자. 사회가 정한 교육 시스템 외에도 살아갈 만한 다양한 길이 있을 거다’ 하고요.” 그때부터 그는 전단 제작 아르바이트를 포함, 광고·기획·마케팅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청소년을 가르치는 교육 봉사도 해봤고, 경영 컨설팅 회사 창업도 해봤다. ‘왜 사는지’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새로운 일을 접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알게 됐다고 한다. “경험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청소년에게 도움 주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려면 경영학과 아동가족학을 공부해야 했죠. 대학에 가야 하는 이유가 생기니 수능 공부도 잘됐습니다. 입학 후 대학에서도 목적의식을 갖고 폭넓게 공부할 수 있었고요.”

    그는 “진로는 객관식이 아니라 주관식”이라고 했다. “학벌의 의미는 점점 작아지고 있습니다. 표준화된 인재가 필요한 산업사회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인공지능까지 등장한 시대잖아요. 앞으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나만의 색깔이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존 일자리만이 답도 아니라고 봐요. 일자리를 스스로 만들면 됩니다. 진로는 주관식처럼 정답이 없는 것 같아요.” 그는 “나만의 색깔을 찾으려면 갖은 경험에 도전하며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또 “남의 시선에 맞춘 것이 아닌, 스스로 찾아낸 삶의 목적을 직업으로 연결해낼 수 있으면 좋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지수Ⅰ“나에 대한 치열한 고민 없으면 학벌도 다 소용없더라”
  • 김지수 너랑 운영팀장. /임영근 기자
    ▲ 김지수 너랑 운영팀장. /임영근 기자
    '학벌 깡패'. 다른 사람 기죽이는 학벌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이 신조어는, 청소년 진로 강연업체인 ‘너랑’의 김지수(23) 운영팀장의 별명이다. 김 팀장은 민사고와 서울대 정치외교학부를 나왔다. 정작 그는 “많은 분이 제 학벌을 보고 놀라지만, 지나온 길을 들여다보면 다른 의미에서 더 크게 놀라곤 한다. 좌충우돌 그 자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 팀장은 우연히 알게 된 민사고 선배들의 모습이 멋있어 보여 민사고 입학을 목표로 밤낮없이 공부했다. 그렇게 입학에 성공했지만 그 후 뚜렷한 목표가 사라졌다. 자신이 무엇을 잘하거나 좋아하는지 모른 채 공부만 했다. 이는 시행착오로 이어졌다. 1학년 땐 막연한 생각으로 해외 대학 진학반에 갔다가 국내 대학반으로 옮겼고, 2학년 땐 수학보다 국어를 좀 더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인문계열을 택했다가 학년 말이 돼서야 대학별 배치표를 보고 가고 싶은 학과가 없어 자연계열로 바꿨다. “동물을 좋아하니 수의학과가 괜찮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 이 학과에 가면 재밌겠다’ 하고 단순히 생각한 거죠.” 다행히 공부도, 경쟁도 즐기는 편이라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합격증을 받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실습을 들어갔다가 ‘피’를 보고 아차 싶었다고 한다. 단순히 귀여운 동물을 보고 즐기는 곳이 아니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하루라도 빨리 뛰쳐나오고 싶은데, 어느 학과로 가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생각해 보니 우연히 들은 정치학 수업이 재밌었던 것 같았어요. 결국 정치학과로 졸업까지 했지만 정치와 관련한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요즘 김 팀장은 ‘너랑’을 통해 1년에 수만 명의 중·고생을 만나 진로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는 “나에 대한 고민 없이 공부만 하다 보니 해외반·국내반·문과·이과·수의예과·정치학과로 계속 떠돌았던 것 같다”고 했다. “특정 간판이나 직업을 목표로 했다가 그걸 성취한 뒤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한 것만 몇번인지 몰라요. 그러는 동안 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고민을 거듭해보니 ‘남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더라고요. 이젠 특정 직업을 목표로 두지 않고, 제 경험을 통해 남을 돕고 경제적인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