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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누구 말을 듣고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상담실에서 전집 수십 질을 쟁여두고 아이를 집에 가둔 채 반 강제로 책만 읽히는 부모를 종종 만난다. 소위 독서영재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는 대인능력과 사회성 결핍에, 상상력 부족에, 심지어 소아우울증 증상까지 보인다.
나는 이는 아동 학대라고 말한다. 수천 년 동안 인류의 아이들은 이렇게 살아본 적이 없다. 아이들은 언제나 또래와 놀며 삶을 터득했다.
유럽 몇몇 나라의 교육은 반성과 숙고 끝에 수천 년 이어져온 인류의 아동발달 모델에서 진리를 발견한 듯하다. 핀란드의 유아교육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유치원 아이들은 어울려 놀기만 할 뿐이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안전만 살필 뿐, 아이들의 놀이에 거의 개입하지 않는다.
나는 상담실이나 강연장에서 자신의 아이가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 형편이 못된다고 말하는 부모들을 만난다. 나 역시 세상이 그렇게 돼버린 것을 알고, 어쩔 수 없는 부모의 처지도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로버트 스턴버그라는 심리학자의 견해를 들려준다. 스턴버그 왈, 지난 세기가 세상이 종잡을 수 없이 엉망진창이었던 것은 분석지능만 뛰어난 비양심적 수재들이 세상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스턴버그 교수는 소위 성공지능이란 것이 있는데(경제적 성공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그 핵심이 실용지능에 있다고 말한다. 실용지능은 말 그대로 삶에서 부딪히는 갖가지 상황들을 대처하는 능력이다. 친구와 어울려 놀고, 들과 산에서 자연의 이치와 실체를 깨달은 아이들에게만 허락되는, 성공을 보장하는 지능이다.
사회공동체가 붕괴되면서 부모들 사이에도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아파트에 살아도 7살 난 내 아이와 놀아줄 또래를 찾기 힘들다. 그런 아이들이 앞 동과 옆 동에 수 십 명 살아도, 아이의 부모는 그 부모와 친하지 않고, 그 집 아이의 존재조차 모른다. 이는 비자연적인 일이다. 예전 같았으면 두 아이는 오래지 않아 친구가 되었을 텐데. 단짝이 되면 좋았을 두 아이는 불과 100m 안에 살지만, 10년이 지나도록 남으로 지낸다.
엄마들은 때로 “그 집 아이는 성격이 나빠”라고 둘러댄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당신 아이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말한다. 그만치 도덕성이 부족하고, 사회성이 미숙할지 모른다고.
이는 진리에 가까운 이야기일 텐데, 한데 어울려 놀지 않는 아이들은 결코 도덕성이나 뛰어난 사회감각을 체득하지 못한다. 걸음마를 떼고, 말을 할 줄 알게 된 아이라면 또래 아이들과 하루 몇 시간 이상 어울려 사회성을 배워야 하는 법이다. 대한민국 아이들에게 이 지극한 권리와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혹 부모들은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던데요 라고 반문한다. 그런데 솔직히, 또 안타깝게도 보육시설 대부분은 어울려 놀고 싶은 아이들의 본성에 충실하지 않다. 훌륭한 보육기관이라 할지라도 놀이터에서 함께 뛰어노는 자유놀이만큼의 발달프로그램을 제공하기 어렵다. 단지 그것만이 목적이라면 애초 보육기관이 필요치 않았을 테니.
또래놀이와 사회성발달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는 책인《사회성 발달 보고서》에서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 진정한 상호작용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부모는 아이를 보육기관에 보낸다고 아이의 사회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여겨서는 곤란하다”며, 보육시설에 맡기는 것만으로는 아동의 사회성발달을 크게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책은 자녀에게 학습지나 전집 읽기를 강제로 시키는 것이 왜 무용한지도 설명한다. 단지 부모의 욕심일 뿐인 “연습문제지, 정규수업, 직접교수법은 최선의 학업성취 방법이 아니다. 초등 3학년까지 아이들에게는 야외 놀이, 자유놀이, 즉흥적 사회활동이 더 많은 두뇌계발과 학업성취 효과가 있다”라고 적고 있다. 꼭 이 책이 아니더라도 뇌 발달과 관련된 연구들에 따르면 아이가 뛰어난 지적 능력과 두뇌를 갖게 하려면 더 많이 뛰어놀게 해야 한다.
이 책에서 권장하는 방식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에서 만나 아이들끼리 놀게 해주는 ‘플레이 데이트’이다. 함께 모인 아이들은, 부모의 개입을 최소화한 ‘자유놀이’를 즐긴다. 돌이켜보면 우리 세대가 이만큼 똑똑해진 것도 우리 부모가 조기교육을 시켜서가 아니라, 어릴 적 또래와 열심히 뛰어놀았던 덕분이다.
아이들이 어울려 벌이는 자유놀이의 중요성에 대해 양육학자 데이비드 월시 역시 공감한다.《스마트 브레인》에서 월시는 “아이들은 자유놀이를 통해 시험해보고, 시도해보고, 실수해보고, 적응하고, 만들어내고, 문제를 해결하고, 역할극도 해보고, 발견하고, 상상하고, 협동하고, 차례대로 해보고, 융통성을 기르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닥쳐보고, 느끼고, 과감하게 도전해보고, 협상하고, 계획하고, 상상하고, 갈등을 해소하기도 한다”고 하며 자유놀이를 예찬한다.
나는 최근 20대와의 상담에서 어울려 놀지 못하는 우리 아이들의 어두운 미래를 점칠 때가 있다. 이미 우리 모두는 지극히 개인적인 존재로 전락해있다. 무엇이 이토록 사람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했을까?
사회학의 구루, 지그문트 바우만은 개인화가 만연된 사회가 결코 개인에게 유리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의 비판은 무시무시하다. 공공의 장이 무너지면 개인은 아주 다루기 쉬운, 친구나 뿌리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세상의 폭력과 권위에 쉽게 압도당하고 만다는 것이다.
내 아이가 혼자 독서하고, 혼자서 수학을 잘 풀고, 혼자서 자기 할 일을 즐긴다고 안심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아이가 또래를 제치고 1등을 한다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어느 순간 우리에게는 진정한 친구가 필요하고, 타인의 배려가 필요하고, 세상의 관심이 필요하다. 개인화된 세상은 이타성, 타인의 온정이 소멸한 사회를 만들고 우리는 서로를 외면하게 된다.
내 아이를 승자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내 아이가 강물에 빠졌을 때, 다른 이들이 모두
팔짱만 끼고 쳐다볼 뿐인 험한 세상을 만드는 일일 뿐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지만, 강둑에 선 자들이 자신이 물에 빠지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형국일 따름이다.
나는 혼자 세상의 억압과 강요에 벌벌 떨고 있는 청년들을 만날 때마다, 당신에게 진정한 친구가 있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대개 자신에게 ‘친구’가 없다고 대답한다.
‘깊은 우정’이라는 것을 모른 채, 거실에서 책만 본, 아니 컴퓨터게임만 하고 있는 우리 아이의 미래는 그들보다 더 어두울 것이다. 때로 참혹할 정도로 우울할 것이다.
양육학자 알피 콘은《경쟁에 반대한다》에서 경쟁이 얼마나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고, 마음의 상처를 가져다주는지 조명하고 있다. 콘은 경쟁이 협력보다 비효율적이며 정서적 위해가 만만치 않다고 설명한다. 많은 연구에서 과제수행에 있어 효율과 성공을 더 보장하는 것은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었다. 그가 꼽는 경쟁의 폐해 가운데 으뜸은 경쟁에 참여하는 사람들 전체의 ‘자존감’이 손상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무한 경쟁에서 영원한 승자란 없으며, 승자는 곧 또 살벌한 경쟁에 나서야 한다. “경쟁의 악순환”이 벌어진다. 자신의 성공이 타인의 실패를 통해 얻어지고, 자신의 실패가 타인에게 성공의 먹잇감이 된다는 관념은 우리 정신을 뿌리째 뒤흔드는 믿음일 것이다.
서로 어울려 놀지 않고, 사람을 단지 사물처럼 대할 뿐인, 단자화된 우리 아이들은 지금 우리보다 더 우울한 삶을 살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박민근의 힐링스토리] 어울려 놀지 않는 아이들의 우울한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