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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학습과 수련을 의미한다. 따라서 공부의 주체는 자신만이 될 수 있다. 학교에 교육을 의탁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공부의 보조 수단일 뿐이다.
진짜 공부를 시작하려면 우선 ‘학교가 공부고, 공부가 학교’라는 관념을 버려야 한다. 이와 같은 오해는 학교에 대한 의존성이 신앙처럼 높을 때 발생한다. 그 결과로 개인은 자연으로부터 선물 받은 학습권을 학교에 주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개인에게 남는 것은 수동적 자세밖에 없다. 수동적인 학습자는 자신이 배우고 있는 내용이 좋은 것인지 아닌지의 여부조차 제대로 판단하기 어렵다. 생존과 안전의 욕구가 지배하는 위기불안 사회에서는 교육소비자가 그와 같은 수동적 학습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데, 장성한 자녀를 둔 부모 세대가 이 경우에 속한다.
그에 반해 물질 풍요의 시대에 나고 자란 자녀 세대는 전쟁이나 굶주림과 같은 공포를 체험하지 않은지라 생존이나 안전보다 한 단계 높은 욕구인 ‘사랑과 소속감’을 갈망하게 된다. 자신이 소속된 가정이나 학교, 나아가 세상으로부터 사랑받는 존재가 되고 싶은 욕구 에너지는 어디로든 향한다. 생산적이며 긍정적인 방향일 수도 있고, 비생산적이며 부정적인 방향일 수도 있다. 집단따돌림과 같은 비이성적 행위는 후자의 경우로서, 이는 사랑받지 못하여 생기는 불안이나 패배감을 달래기 위해 구성원끼리 결속력을 다지는 방편으로 볼 수 있다. ‘함께 한 나쁜 짓’을 통해 그들만의 연대감이라도 느끼고 싶은 것이다.
부모 세대의 학교에서는 볼 수 없었던 ‘평가 거부 동조’ 현상도 집단따돌림과 유사한 심리의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평가 거부는 온종일 책상에 엎드려 자는 학습 거부보다 더욱 적극적인 회피 심리이다. 정기고사 OMR카드에 한 번호만 쭉 내려 긋거나 아무 번호나 찍고 엎드려 자는 행위가 그 예다. 과거에도 이런 객기를 부리는 학생이 교실마다 한 둘씩 없지는 않았지만, 요즘처럼 한 교실에 반 수 가까이 거부 행위에 동조함으로써 평가받기를 회피하는 집단현상은 전에 없던 일이다. 이럴 때 예로부터 교사나 부모가 하는 일이란 학생의 나태함이나 괘씸함을 질책하는 일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래서 얻는 것은 관계의 단절이라는 홀가분함밖에 없다.
사랑과 소속의 욕구가 커진 자녀 세대를 공부시키는 방법은 과거와 달라야 한다. 생존과 안전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했던 부모 세대에게는 훈계, 질책, 명령, 지시와 같은 강압적 방법도 그럭저럭 통했지만, 이제 그 같은 구시대의 관습적 방법은 효력이 다했다. 자녀 세대 욕구 변화에 따라 자녀가 원하는 부모상도 달라졌기 때문에 부모 또한 자녀의 눈높이에 맞는 태도를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격언대로, 낡은 것에 집착하면 새로운 가치 패러다임을 구축하기 어렵다. 자녀에게 수동적이고 복종적인 교육을 받도록 강요하는 것은 진짜 공부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며, 성적에 집착하는 공부를 하도록 압박하는 것은 자녀 세대의 대다수를 삼류로 만드는 일이다.
세상으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는 자녀 세대의 인간상은 ‘자유롭게 사유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자율적 인간’이다. 이를 위해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가?
(6회에서 계속)
≪바라지 않아야 바라는 대로 큰다≫ 외 다수 저술 / 2012 올해의 과학교사, 2006 서울시 우수 상담교사
[신규진의 교육 성장] 공부는 왜 하는가?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