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근의 심리치료] 생각 치유 - 우울감을 이기기 힘들 때
맛있는공부
기사입력 2014.06.24 13:28
  • 우리에게는 우울의 강을 건널 책임이 있다. 삶은 때로 폭풍우 몰아치는 대기를 홀로 날아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울증을 오래 앓았고 끝내 자살을 택했던 장국영의 영화『아비정전』에는 ‘발 없는 새’에 관한 인상적인 독백이 나온다. 영화의 주인공 ‘아비’의 대사는 우울한 생에 응하는 페이소스(Pathos, 동정과 연민, 애상) 가득한 비유이기도 하다.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상담을 받으러 온 사람 다수는 아비가 아닌 실제의 장국영처럼 우울증을 앓고 있다. 꼭 상담가여서가 아니라, 먼저 우울증을 겪었던 나로서는 그 극복 과정을 알려줄, 이를테면 소명이 존재한다.

    성훈씨는 서른을 넘었지만, 여태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전에 했던 일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등학교 기간제 교사와 같은 미래가 불확실한 것들이었다. 사범대를 나온 후 몇 번 다른 일을 기웃거렸지만, 제대 후 줄곧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또 치렀다. 그는 공립학교 교사가 되고 싶었다. 당시도 임용고시를 앞두고 있었다. 

    『소피의 선택』으로 잘 알려진 소설가, 월리엄 스타이런은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그의 우울증 체험기인,『보이는 어둠』에서는 우울증을 다음처럼 묘사한다. ‘암울함, 경직, 무감각, 기이한 연약함, 혼돈, 무능,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어 앞뒤가 안 맞는 상태, 쇠진, 자신에 대한 역겨움, 불길한 기분, 고통, 우울의 검은 폭풍, 짓누르는 어둠, 절망을 넘어선 절망’ 

    성훈씨 역시 그런 곤경에 처해 있었다. 시험 날짜가 다가올수록 그의 불안과 우울감은 끝간 데 없이 치달렸다. 그에게는 특히 절망이 문제였다. 누구보다도 삶의 도전들을 이겨내고픈 마음이 컸지만, 그의 마음은 도무지 극복할 수 없는 ‘짓누르는 어둠’에 휩싸이곤 했다. 절망은 때로 폭풍처럼 그를 뒤덮었다.

    그리고 그의 우울은 여느 우울증이 그렇듯 뿌리가 있었다. 
    아버지는 도박꾼이었다. 가난한 아들을 등쳐먹고, 술에 만취해 행인들과 미친 사람처럼 싸우며, 아내가 모은 푼돈을 주먹질로 뺏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결국 고된 인생살이로 3년 전 췌장암을 앓다 돌아가셨다. 탓해선 안 됨을 아나, 어머니의 죽음 역시 그는 여태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은 어머니를 원망하고 있었다.
    성훈씨의 깊은 고민은 이런 것이었다.

    ‘나에게는 나쁜 피가 흐른다. 인생을 기만하고, 타인의 인생을 망칠 수 있는 충동이 존재한다.’ 그러니 그 사람(그는 아버지를 그 사람이라 지칭했다. 마음이 격해지면 그 인간이라고 했다.)이 유전한, 그 악마 같은 모자람이 시시때때로 출몰할 때마다 말할 수 없는 좌절을 느꼈다. 끊임없이 나태, 그리고 술과 투쟁했지만, 자주 게으른 자신을 목격했고, 상담하러 오기 전에는 폭음을 멈출 수 없었다. 내 인생의 고난 모두가 그 ‘인간’ 탓이라고 했다.

    그런 그에게 나는 담담하게 우울증은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라고 일러주었다. 그는 나의 반응에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실상 우울증은 그리 대단하거나 특별한 일이 아니다. 누구라도 가끔 우울한 것이 정상이며 만약 인생을 살며 몇 차례 깊은 우울감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것은 ‘인생 불감증’일지 모른다. 우울증의 당위성은 존재한다.
    스캇 펙의『아직도 가야 할 길』은 우울한 이에게 변화를 요청하는 책이다. 내적 성장에 관한 한 이만한 치유서를 찾기 어렵다. 나 역시 우울증 탈출에 있어 이 책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인생은 어려운 일이다(Life is difficult).”  

    『아직도 가야 할 길』을 장식하는 첫 문장이다. 저자는 책에서 고통을 직시하고 그 고통을 사랑으로 극복하라고 말한다. 고통을 회피하는 닫힌 마음을 다스려 진실에 맞닿기 위해 사랑을 훈련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에게 사랑은 자아의 영역을 넓히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의존적인 사랑을 경계한다. 그것은 내적 결핍에서 만들어진 퇴행적 감정이라고 설명한다. 참된 사랑은 높은 분별력을 가지고 상대에 대해 진실한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항상 이겨야 한다는 욕망을 포기하는 동안 나는 우울했다. 사랑한 어떤 것을 포기하는 데 따르는 감정, 적어도 내 일부분이고 나와 친근한 것을 포기하는 데 따르는 감정이 바로 우울이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인간은 당연히 성장해야 하고, 정신적 ·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옛 자아를 포기하거나 상실하는 것이 필수 과정이므로 우울증은 정상적이고 근본적으로 건강한 현상이다.”

    스캇 펙은 우울증을 이렇게 정당한 일이라 적고 있다. 문제는 정상적인 포기 과정, 자아 성장 과정에 비정상적인 무언가가 끼어들어 가로막을 때 우울증은 불건강해지고 길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건강하지 않는 우울감은 인생의 위기를 일으킨다. 심지어 우울증 때문에 생을 포기하는 이마저 생긴다. 
    건강한 포기과정을 방해하는 원인으로 스캇 펙이 꼽는 것은 어린 시절의 바람직하지 않은 경험이다. 그는 “부모나 운명이 아이의 요구사항을 채워주지 않고, 아이가 심리적으로 포기할 준비가 되기도 전에, 또는 욕구를 포기해도 정말 괜찮다고 용납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지기 전에, 가진 것들을 빼앗아버리는” 일이 벌어질 때 병적 우울증의 바탕이 만들어진다고 설명한다. 심리학자 도널드 위니캇은 성장하기 위해 건강하게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는 덕성이 만들어져야 하며, 이를 아동기에 체화해야 할 ‘점차적 불이행’이라고 불렀다. 성훈씨는 이 이야기에 깊이 공감했다. 스캇 펙이 옛 자아에서 성장한 자아로 이행할 때, 반드시 포기해야 할 목록으로 꼽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 어떤 외부의 요구에도 응할 필요가 없는 유아기
     ·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환상
     · 부모를 완전히(성적인 것을 포함해서) 소유하고 싶은 욕망
     · 유년 시절의 의존심
     · 부모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들
     · 청소년기의 무한한 가능성
     · 책임 없는 ‘자유’
     · 청년기의 민첩함
     · 청년기의 성적 매력과 가능성
     · 불멸에 대한 환상
     · 자녀에 대한 권위
     · 일시적으로 갖게 되는 여러 가지 권력
     · 신체적 건강의 독립성
     · 궁극적으로는 자신 그리고 생명 자체

    스캇 펙이 제시한 목록을 찬찬히 살피다 보면 어쩌면 인간이란 과거지사 모든 일을 포기해야만 앞날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로 느껴진다. 그래서 삶은 때로 진실로 포기하는 일이니, 우울해지는 것도 피할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그래서 어느 시기 포기의 고통이 한 점으로 응집되는 우울의 정거장을 건너야 한다. 인생의 상심은 이런 연유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우울감은 또한 자기 안에서만 소용돌이치던 폐쇄된 시선이 비로소 외부로 온전히 열릴 때 등장한다. 그것은 이른 바 낡은 자아의 껍질을 한 겹 벗을 때인 것이다. 시선이 자기 안으로만 맴돌 때 세상은 문제가 없다고 오인하기 쉽다. 하지만 그것은 환상이다. 그런 까닭에 어려운 일 없이 자랐던 사람이 한 차례 생의 폭풍을 맞으면 목숨까지 포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강제로 열린 자기와 자신이 쥔 새를 놓칠 수 없다는 강박 사이에서 불필요한 고통을 겪는 일일뿐, 진실한 우울감이 아니다.
    우울이란, 그리스비극을 보고 자연스레 젖어드는 비애감처럼 누구나 자기 자신의 비극적 스토리 앞에서 고통스러움을 체감하게 되는 과정적 감정인 것이다.

    그러나 포기할 줄 아는 법을 깨닫는다는 것이 실제 인생의 일부를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자신의, 더 많은 인생을 떠안는 일이다. 체념(諦念)을 우리는 단념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체념은 진실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체념은 운명을 사랑할 줄 아는 덕의 탄생인 것이다. 결국은 더 큰 지대로 상승하는 일이다.

    성훈씨와 내가 했던 대화 역시 굳게 닫힌 자아를 한껏 개방하는 일이었다. 아버지 탓하기를 종료하고, 내 인생을 풀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는 성찰이 필요했다. 그의 자기 사랑 연습은 3개월가량 걸렸고, 성훈씨는 비록 또 다시 임용고시에 떨어졌지만, 그리 심하게 좌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심 끝에 아버지가 싫어 도망쳤던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한 번쯤은 몇 년 동안 연락을 끊었던 아버지와도 만날 것 같다고 예감했다.

    우리는 아집과 독선으로 가득 찬 낡은 자아에서 껍질을 깨고 나와, 운명 앞에서 스스럼없이 열리는 본래의 나를 만드는 생의 의무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에게는 우울해질 마땅한 권리가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우울의 잠 속에 잠들어서는 안 된다. 새벽이 되어 새들이 날아오르면 우리 역시 조금 깃털을 가다듬은 뒤에 비상해야 한다. 둥지에, 그 낡은 껍질 안에 휩싸여 있어서는 안 된다.

    생이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의 날개는 이미 지금 날고 있는 까닭이다.

    헬로스마일 심리센터 원장 / ≪당신이 이기지 못할 상처는 없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