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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에 다니는 철수씨는 주의력에 문제가 생겼다. 그는 워커홀릭이었다. 일요일에도 회사에 나와 못한 일을 했다. 최근 그는 도무지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주의를 기울여야 해낼 수 있는 일로 가득한 철수씨에게 이는 심각한 일이었다. 스트레스로 인한 불면증도 적잖은 원인이지만, 더 큰 원인은 그의 지나친 스마트 기기 사용이었다. 그는 스마트폰 중독, 아니 스마트기계 중독이었다.
누가 그게 좋은 삶이라고 우리에게 처음 권했는지 모르나, 이제 스마트 기기와 떨어진 삶을 살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스마트 기기에 의존된 삶은 우리들의 시간과 공간을 증발시키는 위기를 초래한다.
“언제 어머니와 통화하셨어요?”/“어제도 했는데요.”/“전화를 시작하자 말자, 빨리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나요?”/“네 늘 그런 것 같네요.”/“철수씨 삶에서는 정한 일을 다 하고 있다지만, 그 뼈대만 있고, 살은 잘 느껴지지 않는군요.”/“무슨 얘긴가요?”
철수씨 삶은 그의 앙상한 체형 그대로였다. 살이 없는 뼈뿐인 삶이었다. 철수씨의 대화에서는 세상 많은 것과 연결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정작 무엇과도 진실하게 대면하지 못하고 있다는 단서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도 마찬가지였다. 하루에 하는 일의 가짓수는 수없이 많았으나, 정작 무엇 하나 제대로 매듭짓지 못하고 있었다.
스마트 기기들은 사람들을 보이지 않은, 실체를 규명하기 어려운 한 공간, 한 자리로 모은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처지에서, 무엇을 하든 그 한 자리에서 심리적으로 벗어나기 어렵다고 말한다. 마치 밧줄에 묶은 썰매 개들처럼 구속이 더 편하다고까지 말한다. 거기서 멀어지면 자신이 도태되거나 지워져버릴 것만 같다는 불안에 시달린다.
이는 단지 ‘환영’일 따름이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환영’이 관할하는 일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오히려 열렬히 그 환영을 떠안으려 한다. 철수씨는 상담하는 도중에도 스마트폰에서 울리는 신호음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잠시 꺼두라는 내 권유에 당황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에게는 자신이 정한 바운더리 안에 놓인 모든 정보들을 섭렵해야 하는 일종의 ‘책임’같은 것이 있었다. 그는 정보중독이었다. 그래서 지인들과의 소통, 관심 웹 영역, 좋아하는 프로그램, 노래, 영화, 자주 가는 사이트, 사이버 공동체 등등, 그가 매일 방문하고 챙겨야 할 사이버 ‘업무’나 ‘소통’은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그의 눈과 뇌는 쉬지 않고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어야 한다는 속박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런 뇌의 혹사는 주의집중력을 파괴한다.
그것은 미래학자 니콜라스 카가 말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뇌의 능력은 초인적일 수 없다. 하지만 정보사회는 초인적인 뇌능력을 요구할 때가 많다.
지나치게 많은 정보는 우리 뇌가 얻은 정보를 비교적 안정된 기억으로, 그리고 정합적인 사고 형태로 안착시키는 일을 방해한다. 작업 기억이 장기 기억으로 가는 회선은 생각처럼 넓고 크지 않다. 뇌의 능력은 매우 한정되어 있다. 주어진 정보가 많아져 작업 기억에 소비되는 에너지가 증가하면 기억력이나 주의력은 처리속도나 정확도가 떨어진다. 니콜라스 카는 이를 ‘인지 부하’라고 부른다. 가해지는 정보량이 우리의 사고능력을 초과할 때 뇌기능은 필연적으로 저하된다. 때로 높은 인지 부하는 주의력장애를 일으킨다. 그런데 이런 산만함이 커지면 심리적으로 사람들은 더 불안해져 더 많은 정보를 소비하려는 욕구, 욕망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또 단기 기억을 처리하는 작업 기억력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불필요한 정보와 필요한 정보, 소음과 중요한 신호를 구분하기 힘들어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분별없는 정보 방랑자가 되고 만다. 철수씨 역시 때로 아무 볼 필요 없는 웹페이지들을 서핑하다가, 중요한 일을 놓칠 때가 많다고 했다.
해결책은 뇌로 유입되는 정보의 양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
<구글이 우리를 바보로 만들고 있는가?>라는 칼럼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니콜라스 카의 경고는 스마트 기기와 그 안에 유동하는 방대한 지식이 가져올 인간적 위기에 대한 것이다. 이미 스마트 기기들이 레이저처럼 방출하는 수많은 정보가 지금 인간의 뇌 안에서 제왕처럼 군림하고 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거꾸로 인간의 뇌를 지배하는 형국이다.
새로운 노예의 삶이 도래한 것이다.
철수씨가 겪고 있었던 위기 역시 그와 같은 것이었다.
그의 마음 안에 남들의 정보가 아닌, 자신의 삶이 들어찰 여유 공간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 밀려드는 정보를 상당 부분 차단하고, 사유와 독서와 명상, 휴식이 깃들 수 있는 ‘공지(空地)’가 마련되어야 했다. 나는 철수씨에게 이제 마음 안에 조그만 벤치와 나무그루터기를 마련하고, 거기서 쉬는 습관을 들이라고 권했다. 니콜라스 카는 인간의 깊이 있는 사고와 공감, 열정은 모두 느린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깊이 있는 사고만이 고요함과 집중을 요하는 것은 아니다. 공감과 열정도 마찬가지이다. …… 안토니오 다마시오가 설명하듯이 그들이 찾아낸 것은 고차원적인 감정은 느리게 타고난 신경 처리 과정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 심리적인 고통에 공감하는 더욱 세심한 정신과정은 훨씬 천천히 활성화됨을 보여준다. 연구자들은 뇌가 “신체적 직접적인 연관을 뛰어넘어 심리학적 도덕적인 상황을 이해하고 느끼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철수씨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조금 느린 삶이다. 나는 우선 앞으로 한 달을 줄 테니 피에르 쌍소의『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시리즈와 생태학자 쓰지 신이치 교수의『슬로 이즈 뷰티풀』을 차분하게 읽어보라고 처방했다. 절대 바삐 읽지 말고 천천히 카페에 들려 커피 한 잔 마시며 읽으라고 조언했다. 그는 책마저도 집어삼키듯 요점정리하고 정복하는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두 책은 제목 그대로 바삐 사는 삶이란 결국 빨리 암에 걸려 빨리 죽음을 맞이하고파 안달하는 어리석은 삶일 뿐이라는 경고를 담고 있다.
특히『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은 현대인이 살아가는 속도의 삶에 대한 전환적인 인식을 촉구한다. 벌써 여러 권이 국내에도 출판된 이 시리즈는 우리에게 느림, 휴식, 자유, 감각, 심적 평안 등과 관련된 생각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저자는 현대인은 불행히도 “고요한 방에 들어 앉아 휴식할 줄” 모르는 어리석음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인생의 고삐를 조금은 늦추고 인생을 음미하는 방식을 되찾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느림의 사유를 바탕으로 상담마다 나와 철수씨는 삶의 속도에 대해 진중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서 그에게 삶의 속도를 조절할 조금 더 신중한 제어장치가 제안했다. 나는 거듭 명상을 권했다. 평소에도 불교에 관심이 많았다던 철수씨에게 ‘마음챙김 명상’ 방법을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푹신한 방석부터 사라고 일러주면서. 좀 더 본격적으로 김정호 교수의『마음챙김명상 멘토링』에 따라 차근차근 명상법을 익히는 법을 알려주었다. 70년대 후반 존 카밧진은 불교명상과 현대적 심리치료를 접목한 새로운 치유법, 마음챙김명상을 제안했다. 자신의 현재 마음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도록 하는 ‘알아차림’의 명상 방식은 아집에 빠진 현대인의 심리문제를 해결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하루 30분 이상 지속적으로 명상을 실천했다. 그의 의식은 조금씩 명료해졌다.
뜻밖에도 적절한 휴식을 취하면서, 그는 입사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일을 더 잘할 수 있게 되었다, 단지 덤으로.
헬로스마일 심리센터 원장 / ≪당신이 이기지 못할 상처는 없다≫ 저자
[박민근의 심리치료] 생각 치유 - 세상이 스마트해질수록 당신의 집중력은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