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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즈음, 내게는 가슴 아픈 이별이 있었다. 나보다 나이는 한 살 어렸지만, 한 학번 높았던 어느 선배의 죽음이었다. 20대를 함께 보낸 그는 나와 각별한 사이였다. 그는 어느 날 모임을 마치고 술에 취해, 혼자 지하도 난간 위에 앉아 있다가 뒤로 넘어져 떨어졌고, 뇌출혈로 돌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오랜 동안 너무도 일상적으로 만나는 술이라는 사물이 내게는 그를 가슴 아프게 떠올리기 하는 매개체였다. 그것이 좋아하던 술을 멀리 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와 나는 늘 선후배 사이로 돈독한 정을 쌓았지만, 그가 죽기 전 우리는 서로 조금 더 깊이 친해졌다.
늘 솔로였던 그가 하루는 혼자 가방을 사러간다고 했다. 그의 가방은 이미 다 떨어져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나는 길에서 아무 가방이나 사겠다고 하는 그를 끌고, 이대 앞의 가방 가게에 가서는 조금은 근사한 가방을 사도록 채근했다. 그는 자기 가방을 사는, 이런 하찮은 일에 후배가 따라와 준 것이 못내 고마웠던 모양이었다.
그 뒤 하루는 내 자취방에 따라온 그와 밤새 이야기를 나누며, 그 사람의 삶의 진심과 포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주검으로 변하자, 나는 깊은 절망과 실의에 빠졌다. 그리고 뒤이어 몇 가지 불운과 고난이 겹치며 나 역시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
그리고 견딜 수 없는 마음을 끌어안고 나는 서울을 떠나 충북 음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미 고전이 된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는 사람≫는 불의의 사고로 아내와 아이를 잃고 황무지에 들어와 사는 엘제아르 부피에의 이야기다. 나는 우울증이 심해지던 즈음, 전에는 건성으로 읽었던 이 책을 다시 한 번 천천히 가슴으로 읽어냈다. 어쩌면 엘제아르 부피에가 가족의 죽음에서 느꼈을 것처럼, 그 선배의 죽음은 내내 나에게 풀리지 않는 숙제였다. 어째서 인간은 허망하게 죽어 가는가? 때로 그런 실존적인 물음이 마음을 치달릴 때면, 내가 살아가는 이 생(生)이 하나의 가치도 가지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비관주의에 사로잡히기도 했고, 삶이 죽음보다 못하다는 유혹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엘제아르 부피에가 결국 깨달은 것은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록 그 운명이 슬픔으로 가득 찬 것이라고 할지라도. 또한 자신이 마주하는 이 하루하루를 성심을 다해 살아가라는 것이었다. 가지고 있는 것이나 할 수 있는 일이 턱없이 모자라더라도.
나는 깊은 무기력감 가운데서도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채소와 작물을 경작하는 일을 묵묵히 계속해나갔다. 열심히 걸어 다녔고, 주어진 작은 일에 성의를 다하기 시작했고, 우연히 만난 인연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그런 정성스러운 일상들은 엘제아르 부피에가 세상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가운데서도, 민둥산에 매일 백 알의 도토리를 심어나가는 일처럼 내 가슴을 울리고, 내 정신을 온전하게 만들었다.
≪나무를 심는 사람≫의 마지막은 생전에 엘제아르 부피에가 심었던 도토리가 자라 울창한 숲을 이루고 많은 사람들에게 큰 은혜를 베푸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 선배가 떠나고 몇 해가 지난 어느 해 봄, 나는 온전히 회복된 마음으로 그를 다시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가 죽기 얼마 전, 함께 나의 자취방에 누워, 그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그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요즘 사람들은 진정성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무가치하다고 느끼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그런 진정성들이 만들어놓은 총합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그를 떠올릴 때, 슬픔은 잦아들었고, 그의 이야기들이 더 가슴에 와 닿았다.
사람은 살아가며, 다치기도 하고, 고통과 역경 속을 헤매기도 하고, 방향을 잃고 잘못된 길에 잠시 들어서기도 한다. 때로는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어제까지 살다간 사람들이 이뤄 놓은 아름다운 결과물일는지 모른다. ≪나무를 심는 사람≫에서도 엘제아르 부피에가 일궈놓은 그 울창한 숲에서,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사람들은 행복을 영위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떠난 그들의 정성으로 엮어진 세상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조금 일찍 떠난 사람들이 남긴 말과 표정, 행동들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밭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단지 슬퍼해서만은 안 되는 이유이다. 그러니 우리는 열심히 성심을 다해 오늘 하루를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살아남은 자들의 의무이자 도리인 것이다.
헬로스마일 심리센터 원장 / ≪당신이 이기지 못할 상처는 없다≫ 저자
[박민근의 심리치료] 소중한 이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