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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상담한 인교씨는 나와 동갑이었다. 서울의 한 대학을 졸업하고 유명한 사회단체에서 활동하던 그는 어느 날 누명을 쓰고, 그 단체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다. 청춘을 바쳤던 일이 허망하게 끝을 맺자 그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죽고만 싶던 시절, 지방에 내려간 그는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나 결혼을 했고, 그렇게 과거를 묻고서 10년 넘는 시간을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그리고 나를 찾았을 때 그는 이미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불안하고, 충동적인 인교 씨의 성격 탓에 올해 10살 난 딸 역시 우울했다. 인교씨의 딸 지윤이는 늘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무기력하고 사소한 일에도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아이의 그런 성격은 인교 씨에게서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었다. 인교 씨 내외는 처음 지윤이의 우울증을 치료받으려고 나를 찾아왔던 것이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인교 씨의 깊은 상처가 드러났고, 나는 그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더 우선일 거라며 그를 설득했다.
인교 씨와 상담하며 나는 다시 한 번 오래 전 나를 떠올리게 되었다.
인교 씨가 자살을 생각하던 때와 거의 비슷한 시절, 나 역시 깊은 절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와 너무나 닮은 그의 이야기 가운데 다만 차이나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20대 활동가 시절 누구 못지않은 독서광이었던 인교씨는 그 사건이 터지면서 책읽기를 중단했다고 했다.
그렇게 외부와 단절된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그날의 자신의 상처에 묻힌 채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오래 전 내가 겪은 이야기를 퍽 오래 들려주었다.
문학을 전공한 내가 심리상담을 하게 된 데에는 나름의 내력이 있다. 물론 문학은 심리학을 삶에서 풀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늘 문학작품을 해석하기 위해 파고들던 심리학이 어느 날 나를 고치는 데 쓰이게 되었다.
서른 무렵 다니던 대학에서 학내 사태가 생겼다. 나는 약자였던 한 교수를 옹호했고, 상대편 교수들이 버티고 있는 모교에서 더 이상 공부를 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십대부터 꿈꾸어 왔던 문학에의 꿈이 한 순간 무너지는 일이었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문학만 공부했던 내게 그것은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나는 선선히 떠났다. 그리고 괜찮을 줄만 알았다.
하지만 내게는 견디기 어려운 우울증이 찾아왔다. 나는 서울을 떠나 시골의 부모님 댁에 내려왔고, 그 상처로 인해 몇 년 간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나는 약이나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깊은 우울증을 이겨냈다. 그것은 모두 책 덕분이었다.
나는 책 한 페이지도 읽기 힘든 무기력감에 시달리면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나를 치유하기 위해 매일 시골의 작은 도서관을 찾았고, 그리고 책을 통해 위대한 마음의 스승들을 만날 수 있었다.
책 속의 빅터 프랭클, 달라이 라마,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마틴 셀리그만은 나에게 치유의 원리를 가르쳐주었고, 역시 책을 통해 스캇 펙, 웨인 다이어, 법정 스님, 틱낫한 스님, 존 카밧진은 나를 마음 깊이 위안했다. 그들의 가르침을 노트에 빼곡히 적고 새기며 나는 조금씩 회복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치유서와 더불어 감동적인 치유영화와 감성적인 그림책, 소설들을 하나씩 섭렵해갔다. 그렇게 책과 좋은 매체를 접하면 접할수록 나는 되살아났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봄, 나 자신은 살며 가장 강건한 정신을 소유하게 되었다. 비바람 치는 세상을 견딜 내면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집 주변에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꽃과 산수유꽃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여유도 온전히 품게 되었다.
10년이 넘었지만, 그 봄날의 따뜻하고 충만했던 기분은 여태 내 뇌리에 생생하다.
그래서 우울증 내담자를 대할 때마다 내가 느끼는 감회는 남다르다. 나의 심리상담은 내 치유 경험을 전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인교 씨에게 다시 책을 읽기를 권했다. 깊은 비관주의에 사로잡혀 모든 것이 무용하다고 여기던 그는, 하지만 지윤이를 위해 다시 한 번 손에 책을 잡았다. 가끔 창밖을 바라보며 이유 없이 눈물을 흘리는 딸을 위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는 심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할 길》부터, 웨인 다이어의《행복한 이기주의자》까지 그는 속도감 있게 읽어나갔다. 조금 늦었지만 책에서 그도 나처럼 치유의 길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달이 흐른 지금, 그는 자신이 품고 있던 깊은 비관성에서 차츰 벗어나고 있다. 마음의 터널에서 벗어나 희망과 평온의 지대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 웃으며 지윤이의 손을 잡고 상담실에 들어선다. 그간 그에게 나는 몇 번이나 힘주어 말했었다. 당신이 이기지 못할 상처는 없다고.
헬로스마일 소아청소년 심리센터 원장 / 퇴계문학치유연구소 소장
[박민근의 심리치료] 당신이 이기지 못할 상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