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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모리’는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죽음을 늘 상기하며 불안에 떨고 있으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유한한 삶을 항상 자각하고 생의 의미와 가치, 감각을 찾는 데 더 정진하라는 의미이다.
죽음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에 죽음이란 언제나 비일상적인 일이고, 거리감이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내가 만나는 내담자들 가운데는 죽음을 직접적으로 경험했고, 그 상처로 삶의 감각이 흐트러져버린 이도 적지 않다.
선혜는 지금 지방의 한 대학 연극영화과에 입학해 연극인이 되기를 꿈꾸는 젊은이다. 그녀는 18살 때 백혈병 진단을 겪고 2년 가까이 투병했다. 마침 동생으로부터 골수를 기증받아 수술을 무사히 마쳤고 수술 경과도 좋았다. 하지만 최근까지 고통스러운 수술과 항암치료까지 잘 이겨내던 그녀가 갑자기 심각한 심적 곤경에 빠졌다. 가늠할 수 없는 공포감이 그녀를 때때로 죽음보다 깊숙이 뒤덮곤 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거쳐 온 죽음의 기억들이 그녀가 죽음 안에 계속 머무르도록 붙잡고 있었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큰 사고나 질병은 겪고 나면 사람에게는 대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라는 질병이 찾아든다. 선혜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었던 것이다.
선혜에게는 수술 후 꼭 6개월 만에 이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분노나 수치심, 어떤 일에 대한 과도한 집착, 우울감,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 등이 동반되었다. 나를 찾아왔을 때, 선혜는 이미 공포에 젖어들어 대단히 무기력했고, 예의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선혜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죽음의 환상들과의 악전고투였다. 꿈의 내용은 정신분석치료의 교과서에 나오는 그대로였다. 꿈 가운데 즐비한 시체들이 놓인 방 같은 것은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선혜는 죽음이라는 공포의 대상에 사로잡혀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심지어 밥 먹고, 잠자는 아주 기본적인 일도 해내기 어려웠다. 이제 겨우 21살일 뿐인, 젊고 생생한 그녀가 지속적으로 죽음을 떠올리고 기억하고 있는 상황은 결코 어울리는 일이 아니었다. 그럴수록 그녀는 “왜 하필 네게?”라고 거듭 자신에게 반문하고 있었다.
선혜의 공포감은 실은 인지적 오류에서 빚어진 것이다. 이미 병원에서도 완쾌될 가능성 높다고 진단하고, 본인 스스로도 수술이 매우 성공적으로 이뤄졌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죽을 뻔 했다는 사실, 그래서 매우 고통스러운 수술을 받아야만 했던 사실에 집착해, 지금 당장 자신이 죽을 수도 있을 거라고 오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수술 후 꾸준히 정신과 약도 복용하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조금 더 자신의 심리적, 정신적 상황과 관련한 설명과 이해를 수용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그녀가 과도하게 죽음을 떠올리는 생각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몇 가지 제안을 했다. 정말 그렇다면 네가 그토록 고민하는 죽음을 제대로 생각해보자는 것이 첫째였고, 또 반대로 실제로 자신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과 일상을 세밀하게 감지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관련해 죽음에 관한 책, 일상에 관한 책과 영상들 목록을 제공했다.
주 교과서는 셀리 케이건 교수의『죽음이란 무엇인가?』와 이정우 교수의『사건의 철학』이었다. 선혜의 고민 자체가 결코 가볍게 다룰 만한 것이 아니었던지라, 조금 벅차긴 했지만 이 책의 조언을 꼭 경청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선혜는 나와 만나는 몇 달 동안 이 두 책을 여러 번 반복해 읽었다. 하지만 연극배우가 꿈인 선혜에게 딱딱한 철학책들보다는 문학작품이나 시가 훨씬 더 효과적인 치유제였다.
어느 날, 일찍 와서 대기실에 앉아 있는 선혜에게 나는 O. 헨리 단편선을 건넸다. 그리고 읽어봤겠지만, 다시 한 번『마지막 잎새』를 읽고서 상담실에 들어오라고 했다. 뉴욕의 가난한 예술가촌에 사는 무명화가 존시는 심한 폐렴에 걸려 생과 사를 오가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병세가 짙어지자 그녀는 삶에 대한 모든 희망을 접고, 창문 너머 담쟁이덩굴에 매달린 잎새들이 모두 저버리고 나면 자신의 생명 역시 다할 것이라고 믿기에 이른다.
친구 수가 아무리 타일러도 그녀는 자신의 생명과 담쟁이덩굴 잎이 떨어지는 것을 동일시하고 있었다. 답답했던 수는 그동안 친하게 지내온, 이웃의 늙은 무명화가 베어만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간밤에 심한 비바람이 불고, 다음 날 창문 커튼을 젖혔을 때, 여전히 담쟁이덩굴에는 잎새 하나가 남아 있었다.
모진 폭풍우에도 떨어지지 않고 버틴 잎새를 바라보며 존시는 다시 생의 의욕을 갖게 된다. 그 잎새는 간밤 비바람을 뚫고서 베어만 노인이 존시를 위해 그려놓은 그림이었다. 베어만은 그 후 폐렴을 심하게 앓았고, 그리고 죽고 말았다. 담장 위에 그려진 마지막 잎새는 변변한 작품 하나 가지지 못했던 베어만 노인의 마지막 걸작이었다.
<마지막 잎새>를 읽고 상기된 선혜는 한동안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는 선혜에게 병을 알게 되고, 수술을 받던 당시를 회상해보라고 했다. 선혜는 그때 자신 역시 존시처럼 자신에게 희망이 없을 거라며 자주 절망했었다고 고백했다. 나는 선혜에게 네가 살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을 한 번 떠올려보라고 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때 겨우 열일곱 살이던 동생이었다. 동생은 누나를 걱정하며 아무 투정 없이 수술에 임했다. 베어만의 마지막 잎새 그림처럼 동생이 건넨 골수 덕분에 그녀는 무사히 살아날 수 있었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 그리고 특히 자신을 늘 끔찍이 예뻐해 주시던 할머니가 떠오른다고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던 날도, 할머니는 자신의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아직도 선혜는 그 체온을 생생히 떠올릴 수 있다고 했다.
선혜와 셀리 케이건의 책에 대해 한 번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우리 인간은 죽은 후 살지 않을 것이기에 결국 죽음을 알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니 우리는 마땅히 삶을 이야기해야 하는 존재이지, 죽음을 기억하거나 계속 반추하는 존재가 될 수 없다고도. 모든 인생이 죽음이란 중력으로 인해 생명이 끝날 것이 명백하지만, 죽음을 모르는 우리는 결국 죽는 바로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삶을 노래해야 하는 존재’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선혜도 그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어느 날은 선혜에게 볼프 에를브루흐는『내가 함께 있을게』를 읽게 했다. 볼프 에를브루흐는 우리에게『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로 무척 친숙한 작가지만, 이 그림책의 내용은 상당히 진중하다. 주인공은 ‘죽음’이다. 어느 날 오리에게 죽음이 찾아온다. 오리는 누구라도 꺼려할 만한 죽음을 친구처럼 따뜻하게 대한다. 그리고 어느 날 오리에게도 자신의 죽음이 찾아온다. 친구 죽음은 죽은 오리를 강에 떠내려 보낸다.
어쩌면 그것은 나이가 들어 생명이 끝나 가는 오리에게 죽음이 조금 먼저 찾아와 같이 지내는 일의 비유인지도 모른다. “죽음은 오랫동안 떠내려가는 오리를 바라보았습니다. 마침내 오리가 보이지 않게 되자 죽음은 조금 슬펐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삶이었습니다.” 이 동화책은 죽음에 대한 특별한 공포감을 가진 내담자 모두에게 읽히는 책이다.
죽음은 늘 인간 존재를 떠받치는 존재이다. 하지만 죽음이 떠받치는 동안 우리는 살고 있고, 또 살게 된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지만, 죽음 위에서 반드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책을 읽으며 환해지던 선혜의 표정이 떠오른다. 상담이 거의 마무리에 돌입할 즈음, 이 그림책을 읽었다. 선혜는 이 동화책은 나중에 꼭 연극으로 표현해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러려면 잘 살아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러니 사는 동안 죽음을 잊는 편이 낫다. 그것보다는 삶을 붙잡고 있는 것이 더 온당하다.
나는 선혜가 공포에 떨며 잃어버렸던, 일상들을 찾아주고 복원하기 위해 애썼다. 일기를 쓰고, 다양한 감각 활동을 하고, 예술적 향유를 풍부하게 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 생이 차오르자 선혜의 죽음도 서서히 존재의 아래로 가라앉았다.
모멘토 모리의 반대말은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다. 그 뜻은 ‘오늘을 잡아라’는 것이다. 나는 늘 선혜에게 죽음을 떠올리지 말고, 오늘의 생의 감각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었다. 당연히 베어만 노인은, 비록 늙은 몸이었지만, 자신이 존시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죽음에 이를 치명적인 일이라고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오늘 한 사람의 삶을 위해, 내가 그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꽃은 무엇일까만 생각했을 것이다. 삶을 살아가기 위한 최선의 방식이었던 셈이다. 나는 선혜에게 내 나름의 해석을 곁들어 들려주었다.
그래서 <마지막 잎새>의 마지막 부분, 수가 존시에게 건네는 대사는 결코 어리석은 수를 책망하기 위한 것도, 그가 죽음으로 다가가는 격한 여정을 그린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오늘의 꽃을 피우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는 지혜의 열쇠일 따름이다.
“흰 생쥐 아가씨, 네게 해줄 말이 있어.” 수가 말했다. “베어만 아저씨가 오늘 병원에서 폐렴으로 돌아가셨어. 아저씨는 단지 이틀만 아프셨어. 그가 아픈 첫째 날 아침 관리인이 아래층 아저씨 방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아저씨를 발견했어. 아저씨의 신발과 옷은 흠뻑 젖어있었고, 몸은 얼음처럼 차가웠어. 사람들은 아저씨가 비바람 치던 날 밤, 밤새 어디 있었는지 모를 거야. 주위를 둘러보던 사람들은 옆에서 꺼지지 않은 랜턴과 사다리,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진 붓, 초록색과 녹색으로 뒤범벅이 된 팔레트가 발견됐고. - 저기 창밖을 봐. 벽에 마지막 잎새가 그려져 있어. 바람이 불어도 그 잎이 펄럭이거나 움직이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지 않니? 아! 사랑하는 존시, 그건 베어만 아저씨의 걸작이란다. - 베어만 아저씨가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던 그날 밤, 저기서 마지막 잎새를 그렸어.”
헬로스마일 소아청소년 심리센터 원장 / 퇴계문학치유연구소 소장
[박민근의 심리치료]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을 위한 힐링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