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근의 심리치료] 부모는 때로 상처가 되기도 한다
맛있는교육
기사입력 2014.01.08 17:32
  • 부모는 은혜로운 존재지만, 때로 인생의 덫이 될 수도 있다. 세상에는 낳을 줄 알았지, 기를 줄 모르는 부모들이 있는 탓이다.

    에밀 졸라의 걸작,『목로주점』은 또 다른 소설인『나나』로 이어진다. 고급 창녀인 나나의 어머니는『목로주점』에서 불륜을 일삼으며 비속한 삶을 살아가는 제르베즈이다. 나나는 자신의 아름다운 육체로 여러 남자를 유혹하며 순간적이고 쾌락적인 삶을 살아가다 끝내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유전법칙을 신봉했던 자연주의 문학의 대가가 보기에 이런 일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는 팥이 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유전의 문제라기보다는 부모의 양육과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아이 행실이 나쁘다며 자녀를 이끌고 심리상담을 청하는 부모가 많다. 하지만 그럴 때 진짜 문제는 대개 어른에게 있다. 문제 삼는 아이의 부정적 언행이란 것이 부모에게서 영향 받은 것일 때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너무 무서운 한 남자가 있었다. 10년 넘게 주로 외국 건설현장에서 중간관리 일을 해왔던 경수씨는 언제부턴가 불안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사람들이 무서워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불안이 배신한 애인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믿었다.

    외국에서 고생해 번 돈으로 애인을 살뜰히 챙겼건만, 결국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애인의 배신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억측이었다. 그에게 불신을 강요한 것은 부모였다. 부모가 불신을 가르쳤다. 그의 아버지는 몹시 엄했다. 또 폭력적이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그는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했다. 그가 대학을 마치자 말자 외국에 도피하듯 일자리를 구한 것도 아버지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잔소리꾼이었다. 아버지에게 당한 만큼 아버지를 꼭 닮은 아들에게 분풀이했다. 누나들 역시 집이 싫어 일찌감치 시집을 갔고, 그는 먼 타지에서 독립과 성공을 꿈꾸며 청춘을 보냈다.

    그 일은 무척 권태롭고 숨 막히는 일이었다고 했다. 상담에 동행했던 누나는 엄마가 아빠에게 매 맞고 있을 때, 경수씨가 마치 남의 일처럼 모른 척했었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충분히 아버지를 완력으로 제압할 수 있었지만, 방안에서 혼자 게임만 하고 있는 동생이 미칠 정도로 미웠다고 했다. 그래서 실제 못난 동생을 몹시 구박했었다.

    나는 다른 가족들에게 그것이 경수씨의 불가피한 생존법이자 심리적인 방어였을 거라고 설명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서로에게서 상처를 받았다. 서로에게 상처를 입혔다. 파괴된 가족의 끝자락에 경수씨가, 불행했던 서른 삶이 서있었다.

    얼마 후 간곡한 내 설득에도 경수씨는 다시 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자기 자신을 조금 이해하게 된 경수씨는 차라리 가족을 보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거라고 말했고, 두려움과 고통을 안고 다시 한국을 떠났다.

    최근 들어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갈등이 도사리고 있는 경우 내담자들에게, 특히 부모에게 집에서 보라고 처방하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마더 쇼크』와『파더 쇼크』라는 심리 다큐이다. 다큐멘터리의 내용은 부모의 부정적 감정과 언행이 고스란히 자녀에게 전해지고, 그로 인해 자녀가 자라서 다시 부모가 겪었던 상처를 답습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에는 결코 닮고 싶지 않던 부모의 언행을, 언젠가부터 자신이 그대로 가족이나 자식에게 행하고 있고, 그것이 가족 모두가 불행을 느끼는 원인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또한 스스로 비통해하는 사람들이 여럿 등장한다. 대개 그것은 이런 모습이다.

    “술 취해 가족을 폭행하던 아버지를 증오해요. 어떠한 애정도 없었어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런데, 지금 나의 모습은 아버지를 쫓아가고 있는 거예요. 똑같이 닮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게 저를 더 힘들게 해요.”
       
    무력한 아이에게 고통을 줄 것이 뻔한 말과 표정을 내뱉는 순간, 그것은 단지 잠재된 자기 화를 드러내는 정도의 화풀이가 아니라 일종의 폭력으로 돌변하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생성된 폭력은 폭력을 낳을 뿐이다. 고통은 고통을 낳을 따름이다.

    심리학자인 알피 콘은 아이의 인격을 해하는 비난이나 체벌, 과격한 언행이 아무런 효험이 없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수천 명을 상대로 이루어진 연구에서 아이 스스로 사고하고 결정하며 행하지 않은 일은 대개 오히려 부정적 감정과 사고를 키울 뿐이라는 점을 밝혀냈다. 심지어 부모가 자녀를 조종하기 위해 진심 없이 내뱉은 칭찬조차도 되레 아이를 올가미 씌워, 세상일에 도전하기 두려워하는 성공 강박증/공포증 아이로 만든다고 지적한다. 

    아이들에게 처벌이 아무 효과가 없는 이유는 명백하다. 우선 처벌은 사람을 분노케 한다. 처벌자 역시 화에 사로잡혀 중심을 잃을 것이 뻔하지만, 화난 아이는 저지른 일이 설사 잘못이더라도 온전히 자기반성할 수 없다. 감정 안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또 처벌은 아이로 하여금 권력이나 억압이 정당한 것이라고 믿게 하며, 마음 깊은 곳에 폭력을 미화하는 심성을 형성한다.

    또 처벌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 부모와 자녀 사이를 벌려 그들이 소통할 수 없게 만든다. 또 처벌이 행해지면 아이는 처벌에 온통 신경이 팔려 문제의 핵심을 놓치고 만다. 처벌로 인해 문제의식이 흐려지고 아이는 왜 자신이 처벌 받는지 방향감각을 잃는다.

    처벌에 농락당한 아이는 단지 처벌이 문제라서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온통 관심이 집중되고, 결국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사람으로 자라게 된다. 처벌에 길든 아이는 인간미 없는 냉혈한이 되기 십상이다. 이렇듯 아이에게 처벌은 백해무익일 따름이다. 폭력을 유전 받은 자는 어김없이 폭력을 행한다.

    폭력은 끝내 되돌아온다. 어떻게 부모로부터 유전된 폭력의 습성을 자기 안에서 끊어낼 수 있단 말인가? 뛰어난 문학가이자 철학자인 르네 지라르는 폭력과 희생양의 연관성을 탐구한,『폭력과 성스러움』에서 인간에게는 폭력에 대해 그럴싸한 변호를 하고픈 비합리적인 욕망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폭력은 오로지 비겁한 일일 뿐이지만, 인간은 그것을 마치 ‘성스러운’ 대상이라고까지 숭배하려는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다고 폭로한다. 그래서 폭력의 결과물인, 희생양을 만드는 상황을 멋진 의식으로까지 각색하는 집단심리와 개인 충동이 존재한다고 분석했다.

    마찬가지, 부모들 역시 자녀에 대한 자신의 폭력이나 비난을 대단한 명분을 가진 ‘거룩한 사업’쯤으로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폭력은 단지 어리석은 이성상실일 뿐이다. 사람이 아닌 짐승의 일이다. 지라르는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내적 결단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것은 예수와 같은 실천이다.

    왼뺨을 맞을 때, 오른 뺨을 내주거나 때린 그를 안아주는 것과 같이, 자신은 폭력을 입었으나 이를 토해낼 때 사랑으로 승화하는 것이다. 그는 폭력에 대해 더 이상 우리는 거짓말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는 자로서 이 악순환을 끊을 결단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의 또 다른 저서,『희생양』의 마지막에 “우리 서로를 용서할 때가 왔다. 아직도 더 기다린다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시간이 없을 것이다”고 적고 있다. 폭력은 타인의 일이지만, 용서는 우리의 일이다.

    다시 외국 건설현장 일을 지원하기 얼마 전, 경수씨에게 마지막으로 권했던 과제 가운데 하나는 암에 걸린 아버지에게 감사의 편지를 써보는 일이었다. 그것은 어마어마하게 고통스러운 작업이었지만, 그에게는 커다란 해방감을 안겨준 일이었다. 그는 끝내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적었다.

    헬로스마일 소아청소년 심리센터 원장 / 퇴계문학치유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