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에는 ‘또 하루 멀어져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라는 구절이 나온다. 조금 일찍 우리 곁을 떠난 그였기에 노래는 더 짙은 울림을 준다. 이별은 인간이 살며 극복해야 할 심대한 과제이다. 사람,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물이나 생각들과 우리는 매일 조금씩 이별하며 살아가고 있다.
쉽게 잊히는 이별도 있지만, 좀처럼 뇌리를 떠나지 못하는 이별 또한 부지기수이다. 어떤 것들과 제대로 이별하지 못할 때 우리는 마음을 다치기 쉽다. 사별이나 이혼, 별거, 가족의 사망과 같은 이별 사건은 그래서 항상 스트레스 지수의 최상단을 차지한다.
내게는 잘 알던 이웃의, 아픈 가족사에 대한 기억이 있다.
정아는 무척 명석하고 착한 아이였다. 아버지는 공장노동자였고, 평생 꿈은 자녀가 사회에서 존경 받는 사람으로 자리를 잡는 일이었다. 성장 과정을 지켜봐온 내 소견으로는 그녀 역시 나처럼 문과 체질이었지만, 선택은 의대 진학이었다.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했고, 그녀는 부산에 있는 모 대학의 의대를 다녔다. 둘 다 수줍은 사람이었던지라 부산 집을 들렀다 가끔 마주치면 가볍게 목례만 하고 지나쳤다. 하루는 서로 다른 버스를 타고 가다 맨 뒷좌석에 맥을 놓고 앉아 있는 그녀를 본 적이 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군대에서 제대하고 부산 집에 머문 지 얼마 지나지 않던 어느 날, 비보가 들려왔다. 그녀가 의사고시에 붙고 인턴 들어가기 직전의 일이었다. 정아가 장롱 앞에 기댄 채 숨져 있더라는 소식이었다. 심장마비였다고는 하지만 의사였던 사람이었기에, 생의 의지를 놓은 것이 큰 이유였다.
비극은 멈추지 않았다. 이듬해 딸의 죽음과 딸이 겪었을 고통 때문에 매일 폭음을 멈추지 않던 아버지마저 숨졌다. 비극은 지속되었다. 이듬해 그녀의 엄마 역시 신장에 문제가 생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생을 마감했다.
20대 중반에 겪은 이 일은 내가 아는 가장 아픈 이야기 가운데 하나이다. 때로 어떤 이별은 감당하기 힘든 슬픔을 가져다준다. 고등학교 시절 정아와 정아 아버지가 웃으며 산책을 가던 일을 기억하는 나에게 이 이야기는 더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사랑하는 딸을 먼저 떠나보내는 아비의 심정이란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일일지 모른다.
이제 나도 딸을 키워봐서 조금은 안다. 딸은 얼마나 안타깝고 아린 존재인지. 아버지와 딸 사이에는 남자와 여자 사이가 아닌, 아끼는 인간과 아낌을 받는 인간 사이의 가장 숭고한 이타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딸과 아버지 사이에는 참으로 절대적인 조건 없는 사랑이 가능하다.
하지만 세상에는 딸에 대한 지나친 애정을, 아버지에 대한 정도를 넘는 사랑을 문제 삼는 이야기가 더러 있다. 프로이트 자신은 정작 거부했지만 여전히 자주 거론되는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아버지를 성애적(性愛的)으로 선망하며 어머니에게 적대적인 딸의 경쟁심리를 표현한 것이다.
단언컨대 아무리 기계문명이 창궐한다고 해도 막스 프리쉬가 절망적으로 서사했던 『호모 파버』처럼 기형적인 부녀 관계는 범해지기 어렵다. 그리스 비극을 모티브로 한 소설,『호모 파버』에는 서로를 몰랐던, 아버지와 딸이 성관계를 맺고 결국 완전한 파멸로 이르는 과정이 치밀하게 극화되어 있다.
혹은 진화심리학의 주장처럼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원이나 지위를 물려줄 수 있으나, 딸에게 아름다움을 물려줄 수 없어 딸을 둔 아버지는 결혼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납득이 가는 가설은 아니다. 비록 통계적으로 그러하다 해도 말이다.
나는 아버지와 딸 사이의 다양한 심리문제를 거의 매일 접한다. 아버지의 부재, 엄했던 아버지, 표현이 서툴렀던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 일찍 여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나 부성결핍 등으로 상처 입은 여성들을 일상적으로 만난다. 조금은 뜻밖에 떠난 아버지 때문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여성을 만나는 일도 다반사이다.
이런 부녀간의 이별이나 상처, 슬픔을 간직한 이를 만났을 때 내가 제일 먼저 권하는 영상이 있다. 애니메이션 <아버지와 딸>이다.
오스카상 수상작이기도 한, 단편 애니메이션 <아버지와 딸>은 부녀의 헤어짐과 그리움을 깊이 있게 생각하게 하는 수작이다. 10분 남짓의 짧은 이 애니메이션에는 어린 시절 헤어진 아버지를 영원히 그리워하는 순진한 여성이 등장한다. 소녀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 작은 배를 타고 타지로 떠난다.
미련이 남았던 아버지는 떠나려는 순간, 되돌아서 다시 한 번 소녀를 꼬옥 안아준다. 소녀는 이후 아버지를 잊지 못해, 이 강둑을 수시로 찾아든다. 비가 올 때나 바람이 불 때나 아버지와 헤어진 강둑에 서서 떠난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짙은 그리움과 허전함은 이 영화를 지배하는 정서와 무드이다.
숙녀가 되어서도, 남자친구를 만나서도, 남편과 아이가 생긴 이후에도, 중년이 되어서도, 그리고 할머니가 될 때까지 그 그리움은 이어진다. 시간의 경과를 표시하며 자주 등장하는, 또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는 어쩌면 인간적인 이별의 한계를 넘어서고픈 소녀의 바람처럼 느껴진다.
한없는 그리움은 죽음 너머의 환상지대까지 이어진다. 노인이 된 소녀는 죽는 순간, 혹은 환상 속에서 다시 아버지와 상봉한다. 흡사 그 장면은 연인의 포옹처럼 느껴지기도 해 오해를 살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내가 느끼기엔 더없이 순결한 사랑의 결합이다.
이 소녀처럼 이별로 인한 상처를 그리움이라는 감정으로 승화하기를 기대하며, 나는 아버지로 인해 마음 아픈 이들과 매번 이 애니메이션을 감상한다.
인간사에서 현실 상황과 내면적 소망은 일치하지 어렵다. 아직 생존해 있지만, 어린 시절 유독 자신에게 엄했던 아버지를 원망하는 여성을 만날 때면 나는 이렇게 설명하곤 한다. 아빠와 아버지는 다른 사람일 수 있다. 아빠였던 사람이 어느 날 아버지가 될 수도 있고, 그러면서 멀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아버지 입장에서 보자면 언제까지나 딸을 품안에 안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딸을 세상에 놓아줘야 할 때가 있고, 그래서 정을 떼야 할 순간도 찾아오며, 사회인인 그로서는 세상의 율법을 알려줘 딸을 현명한 숙녀로 키워야 할 책무마저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딸에게는 아버지와 아빠가 공존하지만, 아버지에게는 한사코 딸만이 존재한다. 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가슴 안에서만은 늘 보호해야할 예쁜 꽃송이가 존재한다. 그래서 다 큰 딸이 제 품을 떠날 때 그 아빠의 속사정 역시 헤아리기 힘든 고통이다.
애니메이션 <아버지와 딸>을 볼 때마다 그렇게 먼저 아버지를 마음이나 삶에서 떠나보냈던 수많은 딸들의 마음이, 딸을 보내는 깊은 아버지의 비애가 겹쳐 떠오른다.
최근 들어 김광석의 노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에 나오는 구절, ‘큰 딸아이 결혼식 날 흘리던 눈물방울이 이제는 모두 말라. 여보, 그 눈물을 기억하오’를 들을 때 떨려오는, 남모를 찌릿함의 이유를 나는 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내적 성숙이라는 점도.
나는 김광석이 그 노래를 부르며 가족과 딸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연민을 느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떠난 김광석의 사진들 가운데는 어린 딸을 안고 해맑게 웃고 있는 것이 있다. 그 딸에게는 발달장애가 있었다. 얼마 전 김광석의 남겨진 가족에 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노래를 부를 때 감정 표현이 인위적이지 않고 살아 있어요. 겉으로는 밝지만 내성적인 면도 제 아빠를 쏙 빼닮았지요.” 아버지의 노래를 들으며 자란 딸이 어머니는 안쓰럽다. “서연이가 아빠의 영상을 보면서 노래 듣기를 좋아하지만 홀로 눈물을 흘리는 걸 보고부터는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도 서연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요즘도 서연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 ‘기다려줘’를 울면서 보고 듣는다. ‘기다려 줘. 기다려 줘. 내가 그대를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
헬로스마일 소아청소년 심리센터 원장 / 퇴계문학치유연구소 소장
[박민근의 심리치료] 사별로 고통스러운 이를 위한 스토리텔링 심리상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