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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책의 소중함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 가치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때로 우리는 이 사실을 잊거나 무시할 때가 있다.
어째서 책이 소중할까?
이 뻔한 질문에 선뜻 답하기 힘든 것은 우선 책이 가진 다양한 효과와 능력들 때문일 것이다. 특히 독서는 다른 대상들이 범접하기 어려운 긍정적인 특성들이 많다. 특히 책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
해럴드 블룸은 독서가 인생에서 중요한 까닭이 책이 가진 탁월한 인생치유력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살며 수많은 상처와 시련을 겪고 견디며 살아간다. 그런데 이 상처 많은 인생이 세상의 험한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마음의 단련과 회복이 무엇보다도 필요한데, 이를 가장 성실하게 도울 수 있는 것이 바로 책이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사람들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정이 너무 취약하고, 위축되거나 사라지기 쉬우며, 공간과 시간과 불완전한 연민, 그리고 가정과 애정 생활의 온갖 슬픔으로 짓눌리기 쉽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훌륭한 책은 깊은 울림을 주며, 그 울림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킨다. 좋은 책을 읽는 사람은 그 새로이 변화된 마음으로 나날의 어려운 삶을 살아나갈 용기를 얻는다.
우리 아이의 앞날에 책이 필요한 궁극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책이 내 아이에게 살아갈 날의 힘을 실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책은 이런 긍정적인 변화를 통해 아이의 인생을 성장시킨다. 우리가 아이에게 적잖은 시간을 들여 책을 읽게 함은 불완전한 인생을 완성품에 가깝게 만들어주는 책의 위력 때문이다. 결국 책을 잘 읽는 아이란 책을 통해 마음이 자라는 아이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이런 책 읽기의 가치를 잊어버리기도 한다. 아이에게 책을 읽히는, 또 읽으라고 하는 이유가 공부를 잘하라는, 남보다 앞서라는, 똑똑해지라는 데에서 비롯된 것일 때가 많다. 부모는 책을 더 많이 읽으라고 하지만 속마음은 이렇게 콩밭에 가있을 때가 있다.
이는 독서를 권하는 바른 이유가 아니다. 부가적인 이유는 될지언정 근본적인 이유는 될 수 없다. 이렇게 책 읽기 자체의 본원적 가치를 따르지 않을 때 아이의 책읽기는 지치고 만다. 나는 책읽기에 지쳐 고통을 호소하는 아이들을 자주 만난다. 그리고 책에 대한 일말의 애정을 잃은 아이를 만날 때도 많다. 치유 받지 못하는 읽기는 읽을 힘을 떨어뜨리고 만다.
우리는 책이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와 지향을 얻는 나침반이기에 아이에게 권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책을 읽는 것은 책 읽기의 정도가 아니다. 너무 많은 나침반은 아이의 시계를 흐리게 한다.
세상에는 좋은 책이 있고, 나쁜 책이 있다. 헤르만 헤세의 글에는 남독(濫讀), 지나치게 많이 읽는 것의 위험을 경고하는 경구가 많다. 그는 책이 ‘무책임한 인간을 더 무책임하게 만들려고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며, 삶에 무능한 사람에게 대리만족으로서의 허위의 삶을 헐값에 제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말한다.
책이 가치 있을 때는 삶을 영도하는 힘을 발휘할 때라고 힘주어 이야기한다. 그러니 영향력 있는 몇 권의 책을 통해 인생을 감동적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일이야말로 아이의 책읽기의 정도이다. 부모라면 책의 권수가 아니라 아이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울림’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아이에게 그 영향력 있는 책을 선별해주는 역할은 당연히 부모를 비롯한 주변의 의미 있는 타인들이 할 일이다. 부모는 좋은 책을 선별하고, 아이가 책을 온전히 소화하는 힘을 길러줄 수 있는 지혜를 알고 있어야 한다. 이런 책의 핵심적인 가치에 충분히 공감했다면, 이제 책이 가진 다양한 부가적인 효능들을 좀 더 이야기해도 좋을 것이다.
책이 아이에게 유독 더 중요한 이유들이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이라서 더 중요한 것이다. 책은 아이의 다양한 성장을 돕는다.
첫째 아이의 지적 성장을 돕는다. 책에는 미처 부모나 주변 어른이 알려주기 힘든 생활의 지식과 정보들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아이들이 책으로 지식을 얻는 법을 알게 되면, 보다 쾌적하고 풍요로운 지적 성장이 가능해진다. 아이의 독서애호감을 길러주면 아이는 평생 의미 있는 지식을 잘 얻고 활용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자면 아이가 책의 정보를 잘 가공하고 이해하는 방법을 알게 이끌어야 한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체계적인 책 읽기 기술이다.
둘째, 책은 두뇌 성장을 돕는다. 독서는 그 자체만으로도 유용한 두뇌자극 활동이다. 꾸준히 책을 읽는 아이들의 두뇌성장은 그렇지 않은 아이와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인간이 고안한 도구 가운데 가장 뇌를 활성화시키는 매체가 책이다. 자기공명영(fMRI)을 통해 뇌의 활성도를 알아보면 여타의 활동에 비해 독서가 뇌활성도를 월등히 높여주는 것을 알 수 있다. 난독증이 있는 아이조차도 몇 주간의 읽기 연습으로 놀라운 뇌 변화가 목격된다는 연구도 있다. 책은 아이의 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가장 효율적이고 적합한 매체이다.
셋째, 책은 아이의 성품 발달을 돕는다. 책 속에는 아이들이 갈고 닦아야 할 긍정적인 성품들이 다채롭게 녹아있다. 좋은 책은 진선미의 전시장이다. 특히 아이들이 자주 읽는 그림책에는 인류가 가꾸어온 소중한 덕성들이 풍부하게 담겨져 있다. 사랑, 이타심, 희생, 배려심 등은 현실에서보다 책에서 더 자주 다채롭게 펼쳐지고 아이들은 책을 통해 이를 배워나갈 수 있다. 단지 체험만으로 긍정적인 성품을 모두 배우자면 너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책을 통해서 더 감동적으로, 또 정확하게 인지하면서 이런 긍정적인 덕성들을 습득할 수 있다. 책은 아이를 바르게 키운다.
넷째, 아이는 책에서 자신의 심미성을 계발한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요즘 들어 미감의 중요성은 더 강조되고 있다. 여러 이유에서 미적 능력이나 감수성은 어린 시절 공들여 키워야 할 능력이다. 특히 예술과 신체활동은 어린이의 감수성 발달을 돕는다. 아이들이 읽는 그림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좋은 그림책은 시와 소설과 명화들이 어우러진 종합예술품이다. 좋은 그림책을 풍요롭게 접한 아이들은 대상에서 미적 요소를 발견하는 감식력이 더 뛰어나다. 대상의 균형과 비례, 색감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말의 아름다움, 리듬감, 유기적 대화능력들을 더 잘 배울 수 있다. 게다가 책을 통해 심미성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풍부한 상상력을 키워나갈 수 있다.
다섯째, 책은 아이의 체험의 질과 양을 늘린다. 로버트 스턴버그는 IQ라고 할 수 있는 분석적 지능보다는 실생활에서 지혜롭게 상황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인 ‘실용지능’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학자이다. 잘 아는 것보다는 잘 응용하고 실행하는 것이 나은 능력이라고 말한다. 책은 아이들에게 세상의 많은 일들을 미리 알려주는 간접경험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깊은 이해는 직접경험에서만큼 ‘선체험’의 질과 양에 의해 좌우되기도 한다. 물론 책에서 배운 내용만으로는 부족하다.
좋은 책과 읽은 책과 관련된 적절한 체험활동이 어우러져야 아이가 실전에 강한 아이로 자랄 수 있다. 이 둘의 조화로움은 더 능동적이고, 활달하며, 삶의 문제를 잘 헤쳐 나가는 ‘실행형’ 아이로 자라게 한다. 오로지 실전만으로 아이의 실용지능을 높일 수는 없다. 책과 삶을 잘 융합해 시너지를 일으켜야 진짜 실행 중심의 아이로 기를 수 있다. 좋은 책은 꼭 알아야 할 대상과 체험에 대한 이해와 바른 대처법을 알려주어서 아이 나름의 실행 기술을 일깨운다.
아이에게 책은 다양한 선물을 선사한다. 힘들 때는 위안을 주며, 알고 싶을 때는 지혜를 주고, 때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며, 선한 마음의 정의를 깨닫게 한다. 책이기에 이 모든 일이 가능한 것이다.
요즘 책을 실용적 정보를 얻기 위한 도구로, 다른 일을 잘 수행하기 위한 편의적 매체로 여기는 경향이 심해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책을 대하고 다룸에 있어서도 무성의하고 무례할 때가 많다. 하지만 부모의 이런 태도는 아이에게 책에 대한 그릇된 위상과 이미지를 전할 수 있다.
책이 신성한 존재까지야 아니겠지만, 대함에 있어 신중함을 잃어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나는 때로 부모들에게 집에 너무 많은 책을 들이지마라고 충고한다. 아이가 소중하게 여기는 책에 한해서 구입을 고려하고 구입한 책은 소중하게 다루는 습관을 길러주라고 일러준다.
책이 귀한 동반자이기에 책의 가치를 잃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소설이론 가운데 ‘이상적 독자(ideal reader)’라는 것이 있다. 이상적 독자는 작가와 서사물의 의도와 움직임 하나하나를 다 이해하고 통찰하는 독자이다. 소설에 진정성 있게 접근하는 독자이기도 하다. 부모의 책을 대하는 자세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부모는 아이에 앞에서 책을 아끼는 솔선수범을 보일 필요가 있다. 부모가 책을 대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접한 아이들은 분명 책을 아끼고 존중할 것이다. 책에 대한 존중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항시 책을 대하는 부모의 마음과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헬로스마일 소아청소년 심리센터 원장 / 퇴계문학치유연구소 소장
[박민근의 심리치료] 어린이의 성장에 책이 꼭 필요한 까닭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