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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초에 나는 평소 흠모하던 퇴계(退溪)의 호를 따 퇴계문학치유연구소를 열었다. 나는 내담자들에게 독서치료라는 말 대신 문학치유라는 말을 자주 쓴다. 독서치료라는 말도 낯설 테지만 문학치유는 더 낯설 것이다.
내가 지어낸 말이다.
내가 독서치료라고 하지 않고 문학치유라고 쓰는 데는 까닭이 있다. 우선 독서치료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독서치료는 독서행위와 상담을 통해 심리문제를 치료하는 심리요법의 한 가지이다. 독서치료에서는 문학작품 말고도 다양한 관련 서적을 활용한다. 또 최근 들어 영화나 다큐멘터리와 같은 영상매체도 자주 활용한다. 또 독서치료에는 시치료나 글쓰기치료, 저널치료와 같은 특수 분야도 포함된다.
문학치유는 독서치료와는 다른 개념이라기보다는 독서치료보다 대중적 방식을 추구하면서 매체는 보다 한정하는 심리완화 기법이다. 대상은 폭넓지만 장르에 관해서는 다소 엄격한 편이다.
일단 문학치유는 독서라는 행위보다는 책이라는 매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독서치료에는 독서행위 자체가 심리문제에 있어 치료적 가치와 특정 기능을 갖는다는 함의가 있다. 반면 문학치유는 특별히 문학이 가진 치유적 권능을 강조하기 위해 만든 말이다. 책은 인간을 변화시킨다. 특별히 위대한 문학작품은 인간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무한한 역능(力能)이 있다. 그래서 문학치유는 책 가운데서도 가치와 의미, 인생경험을 강조하는 특별한 주제를 포함한 문학서적을 우선으로 삼는다.
독서치료는 한편에서는 미국의 도서관 사서들에 의해 발달되었다. 정신과 의사와 협력해 책을 잘 아는 사서들이 고안해낸 합작품이 독서치료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개별 심리문제에 해당하는 치유서의 정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왔다.
하지만 유럽의 독서치료는 이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시인이며 의사이기도 했던 라블레는 항상 자신의 처방전에 문학작품을 적어주었다. 유럽의 독서치료 연구가들은 문학의 신비한 치유능력에 주목한다. 문학은 지식과 정보만을 제공하는 실용적인 텍스트보다, 문학치유 면에서 우월하다. 문학 안에는 마술적 정서력과 상상력, 시대를 통찰하는 가치구성력이 있다. 그리고 그 외에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풍부한 능력이 감동과 영적 ‘훈습(薰習, 불교적 진리수행)’의 과정을 통해 인간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킨다.
효과적인 치료를 위해서 효험이 있는 약이나 처방을 쓰듯 부정적 심리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좋은 문학작품’라는 의미복합체, 가치융합체를 활용해야 옳은 것이다. 내가 굳이 문학치유라는 용어에 집착하는 이유이다.
최근 문학의 범주를 모두 광범위한 매체로까지 넓히는 비평가들이 있다. 이렇게 갈수록 문학의 외연이 넓어지기는 하나, 그 본질적 가치는 역시 인간의 이해와 탐구이고, 나는 이런 본질적 가치와 멀어진 텍스트까지 굳이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하는가에 대해서 무척 회의적이다. 헤르만 헤세의 말을 인용하자면 좋은 문학이 있고, 그렇지 못한 글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언어적으로 성숙한 사람의 의무는 좋은 문학을 분별하는 일이다.
치유적 관점에서만 보자면 기능성과 상업성에 치우친 글까지 치유서에 포함시킬 필요는 없다. 그런 글에 대한 폄하가 아니라, 문학치유에서 보자면 그리 쓸모 있는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임상에서 경험해보면 엄선한 문학작품조차도 내담자의 마음을 제대로 못 움직일 때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문학치유에서는 치유독자의 마음을 감동시켜야 하는 당위가 존재한다. 문학치유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이미 잘 빚어진 문학작품은 사람의 감정을 순치하고 카타르시스(catharsis)한다고 말한 바 있다.
퇴계 이황 역시 우리의 전통시가인 시조가 한시와 달리 노래하고, 춤출 수 있게 해주어 감발(感發, 마음이 느끼어 움직이는 것)하게 하고, 마음이 융통하게 하여 화자와 청자가 서로 공감하는 상태로 나아갈 수 있고, 따라서 문학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치가 도학을 공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상찬했다. 이렇게 이미 우리 인류는 오래전부터 문학의 치유기능을 이해하고 있었다. 특히 퇴계에게 문학은 인간의 성정(性情)을 교화하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었다.
또 내가 치료라는 의학용어 대신 치유라는 단어를 쓴 데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심리적 문제가 커서 치료까지 필요한 대상자는 사실 그리 많지 않다. 반면 치유가 필요한 대상자는 거의 모든 사람이다. 우리는 누구라도 심적 스트레스를 받고 살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한편으로는 고통의 세월을 산다는 면에서 심리문제를 안고 살아간다고 할 수밖에 없다.
또 치유란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일이고, 행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과 문제가 없는 사람의 경계는 모호하다. 그러니 증상이 극심해서 전문적인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면 스스로 나름의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고 마음력을 고양시킬 수단과 방법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학령기 아이들의 경우 더 ‘마음력’을 고양시킬 자기만의 자산이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꾸준한 문학작품 읽기보다 나은 마음력 고양의 수단은 없다. 독서치료는 전문가의 손을 거쳐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지만 문학치유는 누구라도 접근할 수 있는 친근한 대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15살 수영이는 품행장애 때문에 센터에 끌러오다시피 했다. 수영이의 비도덕적인 생활을 참다못한 부모가 아이를 끌고 강제로 상담실 의자에 앉혔다. 이미 수영이는 다른 센터를 전전한 기록이 있었다. 아직 중학생이지만 벌써 담배와 술을 습관적으로 입에 대고 있다. 한 번은 술에 만취한 채 집에 들어온 적도 있다고 했다.
상담실에 앉은 아이는 짙은 화장을 하고 있어서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아직 미성년자임에도 나이 많은 어른들과 교제를 해본 적도 있고, 지금도 어른들과 다름없이 고등학생 오빠와 농도 짙은 연애를 하는 중이었다.
몇 시간을 나는 수영이와 공감적 대화를 이어갔다. 수영이는 서서히 마음을 열어갔다. 그래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어른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감사한 모양이었다, 주변 어른들을 항상 자신의 말을 무시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몇 회기가 지난 어느 날, 밤새 컴퓨터를 했다며 하품을 하며 지루해하는 수영이와 함께 장 지오노의 소설 ‘나무를 심는 사람들’을 각색해 만든 프레드릭 벡의 동명 애니메이션을 관람했다. 그리고 다음 주까지 집에서 장지오노의 같은 소설을 읽어오라고 처방했다. 한 주를 머뭇거렸던 수영이는 끝내 책을 읽었다.
내게 건넨 감상은 고작, “좋았어요.”가 다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수영이와 나의 ‘문학치유’는 시작되었고, 그 후 회기가 십여 차례 이상 지속되었다. 알고 보니 수영이는 원래 책을 싫어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갈수록 수영이는 독서를 즐겼다. 나의 문학적 자극은 수영이에게 ‘퍼덕이는 물고기’처럼 생생한 느낌들을 전달할 수 있었다. 그 후로도 계속 수영이는 여러 권의 문학작품을 읽었고, 차오르는 꽃봉오리처럼 차차 생기발랄한 얼굴로 변해갔다.
아이는 15살다운 청순함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물론 억압적인 명령과 온갖 비난을 일삼던 부모의 언어습관도 심층면담와 대화법 코칭을 통해 전면적으로 바꾸었다. 부모가 바뀌었다는 신호를 감지한 수영이의 변화는 더 극적으로 일어났다. 나는 매 시간마다 부모와 수영이 서로가 포옹하도록 주문했다. 그리고 항상 잠들기 전 서로 감사하고 긍정하는 말을 나누라고 했다.
여전히 나는 문학의 어떤 힘이 사람을 변화시킬까 하는 데에 깊은 궁구심(窮究心)을 갖는다. 나는 문학의 어떤 위력이 사람의 삶을 밑바닥에서 저 상층으로 상승시킨다는 사실에 늘 경외감을 갖고 있다.
마음의 상처가 생겨 잠시 의욕을 잃거나 방황하는 자녀가 있다면 문학작품을 권해보라. 부모가 문학치유의 구체적인 방법을 안다면 더 좋겠지만, 그 문학작품 자체의 치유능력을 믿어도 되는 것이다.
헬로스마일 소아청소년 심리센터 원장 / 퇴계문학치유연구소 소장
[박민근의 심리치료] 문학치유, 마음을 고치는 독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