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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동화' 본 후 한국팬 자처... 전공도 '한국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출신인 안토니나 브라기나(22)씨가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순전히 드라마 때문이었다. 원래 일본 만화를 좋아하는 등 아시아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가을동화'(2000)를 보곤 금세 한국에 매료됐다. 주변에 고려인(러시아 등 독립국가연합 내에 거주하는 한인 교포를 통칭하는 말) 친구가 많아 그들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한국 드라마와 음악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었다.
브라기나씨의 진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그가 다니던 고교의 고려인 이사장이었다. 항상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던 브라기나씨가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걸 알아본 이사장이 그에게 "한국어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해보라"고 권한 것. 이사장의 조언대로 그는 러시아 10대 주요 대학 중 한 곳인 극동주립대학교(FEFU, Far Eastern Federal University) 한국어과에 진학했다.
5년 과정 중 2년이 끝나갈 무렵 브라기나씨에게 다시 한 번 기회가 찾아왔다. 국립국제교육원(NIIED)의 정부 초청 외국인 장학생 사업 대상자로 선발된 것.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 유학은 염두에 두지 않았던 브라기나씨는 이 기회 덕분에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
◇말 안 통해 '따돌림 당한다' 동기들 오해하기도
막상 한국에 첫발을 디딘 브라기나씨는 당황스러웠다. 학교 캠퍼스를 아무리 둘러봐도 외국인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기 어려웠기 때문. 가방을 메고 교정을 지나다닐 때마다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에 곤혹스러웠던 적도 여러 차례다.
"지금이야 유학생이 많아졌지만 제가 처음 왔던 2008년만 해도 손으로 꼽을 정도였어요. 게다가 외모 차이가 두드러지는 서양 학생 수는 훨씬 더 적었죠. 나중엔 적응이 돼 괜찮았지만 처음엔 자꾸 쳐다보는 사람들 때문에 좀 창피했어요.”
유학 초기엔 언어 때문에 마음 고생도 적잖이 했다. 러시아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긴 했지만 수업을 따라가기엔 아무대로 역부족이던 것. 말이 잘 안 통하다 보니 크고 작은 오해도 이어졌다. 한번은 조별 과제를 받았는데 같은 조원들이 자신만 따돌리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알고 보니 브라기나씨의 한국어 실력이 서툰 데다 외국 학생과 공부해본 적이 없는 한국 학생들이 브라기나씨를 어려워했던 게 문제의 원인이었다.
"나중에 사정을 듣고 보니 과제 분담 문제를 상의해야 하는데 친구들은 영어가 서툴고, 전 한국어가 서툴러 소통할 방법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괜찮지만 그때는 친구들을 오해해 많이 속상했습니다." -
◇'평점 3.8' 우등생... "도서관에서 살다시피해요"
브라기나씨가 한국 대학 생활에 적응하기까진 외국인 학생 멘토링 프로그램의 도움이 컸다. 전담 멘토와 교류하며 도서관 이용과 수강 신청 절차 등 학교 생활에 필요한 내용을 익힌 덕분에 초기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던 것. "처음엔 과제에 필요한 자료 찾는 것도 힘들었어요. 시험을 어떤 식으로 준비해야 할지도 막막했고요. 멘토 친구가 아니었다면 요령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엄청나게 걸렸을 거예요."
학교 홍보대사와 국제교육센터 근로장학생 등으로 일한 것도 브라기나씨의 빠른 적응을 도왔다. 학기 초 서먹했던 친구들과 달리 활발한 홍보대사 친구들은 브라기나씨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국제교육원 직원들도 브라기나씨를 살갑게 챙겼다.
학과에 개설된 영어 강의는 브라기나씨 입장에서 일종의 '선물'이었다. 유학 초기 언어에 대한 부담감을 덜 수 있었기 때문.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성적도 이내 상위권에 진입했다. 지난 학기까지의 평점은 3.8. 특히 지난 학기엔 평점 4.3을 받아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조별 과제가 많고 수업 내용도 어려워 요즘은 도서관에서 거의 살다시피해요. 가끔 '한국어를 좀 더 잘했으면 공부가 한결 편하지 않았을까?' 생각하지만 같이 수업 듣는 친구들도 다들 어렵다고 투덜대는 걸 보면 위로가 돼요.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웃음) -
◇"한국인 이해하는 지름길? 같이 술 마셔보기!"
유학 초기엔 향수병에 걸릴 정도로 힘들었지만 요즘 브라기나씨는 한국 생활이 재밌기만 하다. 무뚝뚝하고 불친절한 한국인에 대한 선입견은 친구들과 술자리를 함께하면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친구들과 MT 가서 함께 술 마시며 부쩍 친해졌어요. 처음엔 술자리에서 복잡한 게임도 척척 해내는 친구들을 보면서 ‘한국 사람들은 다 천재인가?’ 하고 깜짝 놀랐죠.”(웃음)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한국 사람들은 술 마시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며 “초면엔 예의를 차리느라 말수가 적은 한국인의 특징도 함께 술자리를 가진 이후 이해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이젠 사람들을 만날 때 먼저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게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한국 문화가 익숙한 브라기나씨지만 여전히 ‘이해 불가’인 부분도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인사할 때 이름이 아니라 사는 곳과 직업부터 묻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브라기나씨는 내년 8월 졸업을 앞두고 있다.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한국 대학 졸업반 학생'이다. "한국 생활을 꿈꾸며 유학길에 올랐으니 기왕이면 졸업 후에도 한국에서 직장을 구해 살고 싶다"는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다.
"경영학 전공을 택한 것도 취업에 유리하기 때문이에요. 학교 공부에 치여서 아직 구체적 진로는 못 정했어요. 일단은 학교 공부 열심히 해 성적을 잘 받는 게 우선이에요. 취업은 다음 학기부터 고민해볼 생각입니다."
"취업 고민으로 골치 아픈 건 유학생도 똑같죠"
김구용 조선에듀케이션 기자
kky902@chosun.com
[나의 한국 유학기] ③안토니나 브라기나(건국대 경영학과 4)
-한국 드라마 즐겨보다 주변 추천으로 한국행 결심
-타고난 '노력파'... 지난 학기 평균 학점은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