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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상담에 있어 책은 훌륭한 치유 수단이다. 많은 경우 아이들이 책을 통해 상처받은 내면을 치유하는 것이 효과적이고 적절하다. 손아래 형제가 태어나면 좋은 일도 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큰 슬픔과 상실에 직면한다. 눈이 예쁜 네 살 난 누리는 얼마 터울이 지지 않은 동생이 태어나며 지금 큰 슬픔을 맛보고 있다.
자신만의 엄마와 아빠가 이제 동생을 쳐다보고 돌보고 어루만지는 시간이 훨씬 많아졌기 때문이다.
누리 편에서 보자면, 그것은 하루아침에 생긴 날벼락 같은 일이다. 며칠 엄마가 보이지 않더니 하얀 보자기에 싸인 동생이란 녀석이 나타났고 그러면서 모든 일은 뒤죽박죽이 되었다.
네 살 누리에게 동생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신이 가졌던 특권들을 동생과 함께 나누도록 설득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럴 때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동생 출생과 관련된 책들이다.
누리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받고 싶어 했다. 나는 우선 ‘엄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갈래요’라는 그림책으로 누리의 마음을 한껏 공감해주었다. 그리고 ‘난 우울해요’라는 그림책을 통해 동생이 태어나며 겪고 있는 어려움들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네 살짜리에게 책들로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해준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다. 우선 나는 누리 부모님께 간단한 신체놀이를 통해 동생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법을 알려드리며 긍정적 조건화 방법들을 코칭했다.
치료실에서 누리는 책보다 다양한 동영상 심리치료 자료들에 훨씬 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심심할 때마다 누리는 엄마의 스마트폰을 뺏어 이리저리 조작하는 일에 꽤나 익숙해 있었다. 동생이 태어나며 엄마도 누리의 이런 요구를 거부하기 힘들어졌다. 누리가 가장 기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성준이의 경우도 책은 무척 상대하기 싫은 대상이었다. ADHD가 있으며, 친구들에게 공격성을 자주 표출하는 성준이에게 책은 짜증나고 공포스럽기까지 한 대상이다. 가장 큰 이유는 읽기 힘들어하는 자신의 상황과 특수성을 무시하고 상당 기간 부모나 선생님들이 강제적인 독서를 요구해왔기 때문이었다. 반면 컴퓨터 사용은 성준이가 가장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이었다.
성준이의 경우 불가피하게, 미디어저널치료와 독서치료의 비율을 3:1 정도로 조정해 책을 읽는 양과 수준을 최소화했다. 성준이의 경우 컴퓨터에서 재생되는 심리치료 동영상들에 그나마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편이었다.
미디어저널치료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내가 계발하고 있는, 특히 독서부적응 아동에게 효과적인 심리치료 프로그램이다. 누리와 성준이의 치료 사례는 최근 내가, 아니 우리가 직면한 우리 아이들의 독서현실, 독서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멀티미디어 세대의 아이들은 대개 책을 사랑하지 않는다. 책을 마치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먹는 후식 정도로 생각하고 또 그렇게 반응한다.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이제 책은 다른 여러 가지 미디어나 활동을 접하다가 선택하게 되는 사소한 한 가지 요소에 불과하다.
이런 이유에서 2세 이전에 컴퓨터나 TV, 스마트폰 등의 멀티미디어와의 접촉을 철저히 반대하는 학자들이 많다. 뇌가 대부분 완성되어가는 이 결정적 시기에 자극적인 멀티미디어와 친밀하게 접촉하면 우리 뇌가 책이 아닌 이런 멀티미디어 등에 더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쾌락적으로 반응하도록 세팅된다는 것이 그들의 주요한 반대 근거이다. 특히 대부분의 학자들은 수동적 시각매체들에 극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장차 아이의 문자해득력과 주의집중력을 크게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IT강국의 부모들답게 우리 엄마, 아빠들의 태도와 관점은 아이들의 멀티미디어 접근에 무척이나 관대한 편이다. 다수의 통계에 따르면 일본에 비해 우리 영유아의 멀티미디어 사용시간이 10배 이상 된다고까지 한다.
물론 이런 상황에 이른 속사정은 맞벌이와 핵가족 현상이 일반화된 지금, 날로 발달하는 멀티미디어만큼 더 친절하고 손쉬운 양육 도우미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아이들이 정신을 잃고 수동적으로 몰입하게 하는 데는 각종 멀티미디어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척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제 독서치료 역시 아이들의 눈높이에 그리 맞지 않은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이미 많은 아이들이 책으로 구구한 설명과 설득, 정서반응을 일으키려는 심리상담가의 노력에 그리 협조적이지 않다. 그런데 매체가 달라지면 오히려 반응은 180도 바뀐다.
그림이 많은 책들마저 거부하는 성준이에게 책을 읽는 일의 중요성을 다룬 플래시동화인 ‘체피토 뭐 하니?’를 틀어주었다. 물론 이 치유 동영상은 비교적 안전하고 유익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학교와 책을 싫어하는 체피토의 이야기가 화면에 펼쳐지자, 성준이의 눈은 좀 전과는 달리 초롱초롱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날의 심리치료가 끝나고서, 성준이 엄마에게 나는 넌지시 말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아이의 매체기호를 존중해야 할 테지만, 분명한 것은, 또 꼭 필요한 것은 다시 성준이가 책 읽는 일이 무척 소중하고 즐겁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랍니다.”
헬로스마일 소아청소년 심리센터 원장/ 서울ND의원 문학치료연구소 소장
[박민근의 심리치료] 멀티미디어 시대의 아동심리상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