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위인전] 영원한 마라토너 이봉주
안양=류현아 기자 haryu@chosun.com
기사입력 2010.12.28 01:19

지난 20년간 풀코스 41회 완주
"목표의식 있기에 가능했죠"
응원해주는 가족ㆍ국민 위해 금메달 꿈 가슴에 품고 달려

  • 이름 앞에 ‘국민’이란 수식어가 붙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선수 시절 ‘국민 마라토너’로 불리며 큰 사랑을 받았던 이봉주 씨(40세).

    1990년부터 20년간 그는 총 43회(은퇴경기 포함)의 마라톤대회에 출전해 41회 완주했다. 올림픽 금메달을 따진 못했지만 한결같은 그의 모습은 언제나 진한 감동을 주곤 했다. “마라토너로서의 인생에 100% 만족한다”는 그를 지난 17일 안양에서 만났다.



  • ◆손기정 다큐 보며 태극마크 꿈꾸던 내성적 소년
    어릴 땐 달리기에 소질이 있다고 느낀 적이 없어요. 운동회에 나가 상 받아본 기억도 전혀 없죠. 하지만 시골(충남 천안)에서 나고 자랐으니 달리는 건 생활이었어요. 집에서 초등학교까지가 3㎞ 정도 떨어져 있었거든요. 초등생에겐 결코 만만찮은 거리였죠. 걸어서 30~40분은 가야 하는 그 길을 6년 내내 뛰어다녔어요. 돌이켜보면 그런 경험이 마라톤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어요. 기초가 닦였다고나 할까요?

    어릴 때부터 운동선수가 되고 싶긴 했어요. TV에서 손기정 선생님(1932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의 일생을 그린 프로그램을 봤는데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거든요. ‘나도 저분처럼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나라를 대표해 뭔가 할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어요. 꼭 마라톤일 필욘 없었죠. 워낙 스포츠를 좋아해 어떤 종목이라도 상관없었어요.

    성격이 내성적인 편이에요. 예전부터 그랬죠.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있는 걸 좋아했어요. 특히 부끄럼이 심해 여자애들하곤 전혀 말을 못했어요. 포크댄스 시간이면 쑥스러워 손에 나뭇가지 같은 걸 쥐곤 그걸 잡으라고 했죠(웃음). 오죽하면 고교생 때 별명이 ‘색시’였어요.

    하지만 무슨 일이든 맡으면 쉼없이 노력해 결국 해냈어요. 부모님이 농사일을 시켜도 꾀 부리거나 핑계 대는 법이 없었죠. 공부요? 그건 좀…(웃음).

    ◆어머니·가족·국민 생각하며 20년간 41회 완주
    마라토너의 길이 열린 건 고등학교 다닐 때예요. 1학년 때 처음 만난 친구가 ‘상근이 아빠’로 잘 알려진 이웅종 이삭애견훈련소장이었거든요. 그 친구가 육상부 가입을 권유했어요. 워낙 뛰는 걸 좋아해 별 고민 없이 그러자고 했죠.

    육상부에서 받은 첫 번째 훈련은 험한 산길을 넘어 독립기념관까지 가는 거였어요. 10㎞가량 되는 직선 코스였죠. 다른 부원들은 대부분 중학교 때부터 운동을 시작한 아이들이었어요. 하지만 그들에게 뒤지지 않고 무사히 훈련을 마쳤죠. 그때 ‘아, 나도 가능성이 있구나!’ 생각했어요.

    운동을 하겠다고 하자 부모님이 크게 반대하셨어요.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에 뒷바라지해줄 여유가 없다는 게 이유였죠. 축구나 야구가 아닌 육상 선수가 된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육상은 다른 종목에 비해 비용이 덜 드니까 그나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대회에 출전해 상장을 하나 둘 보여드리자 부모님도 조금씩 마음을 여셨어요. 실력으로 부모님을 설득한 셈이죠.

    고교 졸업 후 실업팀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마라톤을 시작했어요. 20년간 풀코스(42.195㎞)를 41회나 완주할 수 있었던 건 목표가 뚜렷했기 때문이에요. 첫 번째 목표는 ‘어머니를 편하게 해드리는 것’이었어요.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거든요. 성적이 좋으면 돈도 많이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 새로운 목표가 생겼어요. 결혼 후엔 아내와 아이들의 행복이 목표가 됐어요. 마라톤 역사에 남는 선수가 되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어요. 사랑해주시는 많은 분들을 생각해서라도 포기할 수 없었죠.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아쉽게 은메달에 그친 후 욕심이 더욱 커졌어요. 변함없는 응원을 보내주는 국민들을 위해서라도 꼭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고 싶었답니다.

  • ◆지난 인생 100% 만족… “받은 사랑 꼭 보답할 것”
    사람들은 묻습니다. 마라톤 하는 게 힘들지 않으냐고요. 하지만 100를 뛰든 1만를 뛰든 고통스럽긴 매한가지예요.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면 힘들어도 이겨내야죠. 남이 내 고통을 대신해줄 순 없잖아요.

    운동을 시작한 후 은퇴할 때까지 거의 매일 훈련을 했어요. 어쩌다 휴가가 생겨도, 심지어 신혼여행지에서도 뛰고 또 뛰었죠. 마라토너로 산 내 인생에 100% 만족해요. 분에 넘치도록 큰 사랑을 받았으니까요. 물론 애틀랜타 올림픽 당시처럼 아쉬웠던 순간도 있어요. 특히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땐 너무 속상했어요. 경기 도중 다른 선수와 부딪쳐 넘어지는 바람에 모든 게 엉망이 돼버렸으니까요. 내심 자신 있는 경기였는데…. 정말 많이 울었어요. 

    은퇴는 했지만 요즘도 운동을 해요. 앞으로 하게 될 일도 마라톤 쪽일 거예요. 유학도 생각하고 있고요. 그동안 받은 사랑을 되돌려드릴 수 있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고민하고 있어요.

    어린이 여러분에게 꼭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반드시 목표의식을 가지란 거죠. ‘올림픽 금메달’이란 목표가 없었다면 저 역시 이 자리까지 올 수 없었을 거예요. 공부든 운동이든 상관없어요. 각자 잘할 수 있는 분야로 목표를 정하세요. 나침반이 있는 인생과 그렇지 않은 인생은 종착점이 다를 수밖에 없단 사실, 꼭 기억하세요!

    >>이봉주 선수는
    1970년 충남 천안에서 2남2녀의 막내로 태어나 천안농고에서 육상을 시작했다.1990년 서울시청 육상단에 입단하면서 마라톤에 입문했다. 1996년 후쿠오카마라톤(2시간 10분 48초)과 2001년 보스턴마라톤(2시간 9분 43초)에서 우승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선 2시간 12분 39초의 기록으로 아쉽게 은메달에 머물렀다.

    그가 세운 ‘풀코스 대회 43회 출전, 41회 완주’는 전 세계 마라톤 역사상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대기록이다. 마라톤 풀코스 부문 한국 신기록(2시간 7분 20초, 2000년 도쿄마라톤·2위)도 보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