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패 떠나 따뜻한 응원 보내주세요"
김재현 기자 kjh10511@chosun.com
기사입력 2010.11.03 09:47

광저우 아시안게임 체스 대표 '초딩 4인방'을 만나다
35대1 경쟁률 뚫고 국제 무대 출전
체스 두면서 많은 외국 친구 사귀어

  • 2006년 카타르 도하 아시안게임.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체스(chess) 경기에 한국 국가대표는 아무도 없었다. ‘앉아서 하는 게임’인 체스를 스포츠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4년이 흘렀다. 이제 체스는 마인드 스포츠(mind sports·바둑이나 체스처럼 두뇌 싸움으로 승부를 겨루는 경기)로 분류돼 당당히 스포츠의 한 종목으로 이름을 올렸다. 11월 열리는 광저우 아시안게임엔 국가대표도 10명이나 선발됐다. 눈부신 변화다.

    사상 최초로 ‘체스 금메달’에 도전하는 우리 국가대표팀 중 네 명은 초등학생이다. ‘선수가 부족해서’라고 생각하진 마시길. 올 6월 350여 명이 참가한 대표 선발전에서 당당하게 뽑힌, 진짜 대표급 선수들이다.

    장재원 군(서울 갈산초 6년), 변성원 양(경기 수원 대선초 6년)·임하경 양(서울 금북초 6년)·김태경 양(서울 상계초 5년). 대한민국 어린이를 대표해 국제무대에서 활약할 이들을 지난달 28일 만났다.


  •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체스 국가대표로 출전하는 어린이 세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팀 내 또 한 명의 초등생 장재원 군(왼쪽 사진)은 그리스에서 열리는 체스 올림피아드에 참가해 이날 함께하지 못했다.(오른쪽 사진 왼쪽부터)변성원·김태경·임하경 양./ 남정탁 기자 jungtak2@chosun.com
    ▲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체스 국가대표로 출전하는 어린이 세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팀 내 또 한 명의 초등생 장재원 군(왼쪽 사진)은 그리스에서 열리는 체스 올림피아드에 참가해 이날 함께하지 못했다.(오른쪽 사진 왼쪽부터)변성원·김태경·임하경 양./ 남정탁 기자 jungtak2@chosun.com
    ◆“이래 봬도 7년차 ‘체스 고수’라고요”

    서울 영등포에 위치한 대한체스연맹 사무실에서 만난 ‘초등 국가대표’들은 아직 아시안게임 출전이 실감 나지 않는 듯했다. 태릉선수촌에 모여 연습에 구슬땀을 흘리는 다른 종목과 달리 체스엔 합숙 훈련이 없는 것도 그 한 요인이다. 하경이는 “솔직히 어떨 땐 내가 정말 아시안게임 국가대표인지 잘 모르겠다”며 “반 친구들도 진짜 광저우 가는 것 맞느냐고 물어볼 정도로 학교에 꼬박꼬박 나간다”고 말했다. 성원이는 “아시안게임 나가는 것보다 한 달 만에 체스 친구들을 만난 게 더 기분 좋다”고 말했다.

    아직 어리지만 이들의 체스 경력은 짧게는 5년, 길게는 7년씩이나 된다. 광저우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남자팀을 통틀어 제일 나이가 어린 재원이는 여섯 살 때 처음 체스를 접했다. 재원이의 어머니 이숙은 씨는 “컴퓨터 게임에 빠져 있는 아들이 걱정돼 게임을 대체할 놀이를 찾던 중 체스를 접하게 됐다”며 “한 가지 일에 빠지면 무서울 정도로 집중하는 재원이에게 체스는 딱 맞는 놀이였던 셈”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까지 살다 온 성원이는 한국에 온 후 본격적으로 체스를 배웠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땐 말도 서툴고 적응하기도 쉽지 않았는데 프랑스에서 잠깐 체스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당시 체스는 외롭던 제게 친구나 마찬가지였죠.” 하경이와 태경이는 서울 중구 청소년수련관에서 열린 체스 강좌에 참가하며 말(馬)을 잡았다. “처음엔 종이 접기 강좌를 들었는데 적성에 안 맞더라고요. 이리저리 한눈팔다가 우연히 체스 강좌도 있다는 걸 알고 호기심에 시작하게 됐죠.”(임하경) “처음엔 체스가 취미였는데 하다 보니 재미도 있고 실력도 조금씩 늘더라고요. 그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해봐야겠다 생각한 것 같아요.”(김태경)

    ◆“외국 친구 사귀기요? 체스 배우세요!”

    이들이 생각하는 체스의 매력은 뭘까? 대답은 뜻밖에도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였다. 체스를 할 줄 알면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와 문화도 다른 외국 어린이와도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재원이의 어머니 이숙은 씨는 “경기할 땐 승부욕에 불타 눈빛부터 달라지는 아이들이 경기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사진도 찍는 등 금세 친해진다”고 말했다. 태경이는 “체스를 한 이후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신기하면서도 좋았다”며 “장래 희망을 외교관으로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경이의 어머니 박혜일 씨는 이들이 체스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도 살짝 귀띔했다. “희한하게 체스 올림피아드 대회 기간이 매번 중간·기말고사 기간과 겹쳐요. 경기 출전을 핑계로 시험을 보지 않을 수 있으니 체스를 열심히 할 수밖에 없죠.”(웃음)
    하경이는 최근 경험담 하나를 들려줬다. “한번은 담임 선생님이 한 야구 선수 사인을 받아달라고 하시는 거예요. 국가대표단이 단체로 광저우로 출국할 때 비행기에서 만날 거 아니냐면서요. 그럴 때면 ‘체스 하길 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세계적인 선수들과 겨루며 더 발전할 것"

    광저우 아시안게임 체스 경기는 오는 18일부터 9일간 열릴 예정이다. 개인전·단체전 두 부문으로 나뉘는데 어린이들이 출전하게 되는 종목은 단체전이다. 송진우 체스 국가대표팀 감독은 “선수들이 올림피아드를 몇 차례 치러본 경험이 있어 감각은 좋은 편이지만 워낙 세계의 벽이 높다”고 평가했다. 현재 한국 남녀 체스팀의 세계 랭킹(순위)은 170개국 중 135위(남자)·117위(여자)다. 대진(對陣·경기에서 적수로 겨룸)이 나쁘면 한 번도 못 이긴 채 귀국 비행기를 타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네 어린이는 당찼다. 하경이는 “모든 경기에서 다 질 수도 있지만 아홉 경기 중 절반은 꼭 승리를 거둔다는 각오로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국가대표 선수단 중 제일 막내인 태경이는 “국가대표가 된 게 친구들에게 알려지며 자부심이 생겼다”며 “최선을 다해 꼭 메달을 따고 싶다”고 말했다. 성원이는 “아직은 실력이 부족하지만 이번 출전을 통해 세계적인 선수들과 겨루며 더욱 발전하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황병돈 대한체스연맹 부회장은 ‘어린이 체스 국가대표팀’에 대한 국민의 따뜻한 응원을 당부했다. “이 친구들은 ‘한국 체스 국가대표 1호’입니다. 당연히 실력이 부족할 수 있죠. 하지만 올해 아시안게임에서 터를 닦아놓고 점점 실력을 쌓아나가면 얼마나 훌륭한 선수로 성장하게 될지 몰라요. 최고는 아니더라도 최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박수 쳐주시기 바랍니다.” 


    체스(chess)

    두 명의 선수가 규칙에 따라 말(馬)을 움직여 상대의 왕(king)을 잡으면 승리하는 게임. 규격에 관계없이 8줄 64칸으로 된 판을 절반으로 나눠 경기가 치러진다. 말은 검은색(혹은 진한 색)과 흰색(혹은 옅은 색) 두 가지로 구성되며 흰색을 잡은 경기자가 먼저 말을 두게 된다. 인도에서 시작됐지만 서양 각국에서 크게 발전했으며 현재는 마인드 스포츠로 각광받고 있다. 세계체스연맹(FIDE)은 2년마다 체스 올림피아드를 개최해 뛰어난 성적을 거둔 선수를 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