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배 작가의 맛 이야기] 막걸리를 모주(母酒)라 부르는 이유
기사입력 2010.08.28 23:29

"대비마마께서 노씨 부인을 모셔 오라 하셨소"
술집 주모가 인목대비의 어머니였다니…

  • 조선 제15대 광해군 때의 일입니다.

    지금의 제주도 제주시 한경면 신창리 마을 어귀에 자그마한 술집이 문을 열었습니다. 술집 주인인 주모는 50세쯤 돼 보이는 중년 여인이었습니다. 기품 있는 몸가짐에 학식이 있고 인심이 좋아 이 술집엔 많은 손님이 찾아들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주모를 존경해 어머니처럼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주모에 대해선 알려진 게 전혀 없었습니다.

    주모는 마을 사람들과 어울릴 때 스스럼없이 웃고 떠들었습니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땐 얼굴빛이 몹시 어두웠습니다. 육지 쪽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푹 쉬기도 했습니다.

    이 술집에서 파는 술은 다른 술집들과는 달리 희부옇고 탁해 마치 쌀뜨물 같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제주도엔 ‘막걸리’란 이름조차 없었고, ‘청주’라고 부르는 맑은 술을 주로 마시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모가 파는 술인 막걸리, 즉 탁주를 한번 맛본 사람들은 단골이 돼 열심히 술집을 드나들었습니다. 탁주가 값이 아주 싼 데다 맛도 좋아서였습니다.


  • 삽화=양동석
    ▲ 삽화=양동석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새벽에 바다 저편에서 해가 솟아오를 때,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술집 처마 끝에 앉아 시끄럽게 울어댔습니다.

    “까치가 아침에 찾아와 울면 기쁜 소식이 있거나, 반가운 손님이 온다던데….”

    그러나 주모는 이내 고개를 저었습니다.

    “가족이 죽고 집안이 망한 나한테 기쁜 소식이 있을 리가 있나.”

    주모는 까치를 올려다보며 혼자 탄식했습니다.

    그때 단골손님인 어부 한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오며 외쳤습니다.

    “주모! 기쁜 소식이 있어요!”

    “김 서방, 어찌 된 일이에요? 김 서방한테 좋은 일이 생겼어요?”

    주모가 의아하다는 듯 묻자, 김 서방은 대답 대신 주모 앞에 엎드렸습니다.

    “주모! 아니, 부인! 제가 아니라 부인에게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육지에서 부인을 모시러 왔어요.”

    주모는 김 서방의 말을 듣고 얼굴빛이 달라졌습니다.

    “나를 모시러 왔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혹시 금부도사가 나를 죽이러 왔나요?”

    “금부도사도 왔고요. 한양에서 사신들이 왔어요. 빨리 바닷가로 가보세요.”

    주모는 김 서방을 따라나서려다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병졸들을 거느린 금부도사 일행이 들이닥친 것입니다.

    금부도사는 주모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연흥부원군 김제남 대감의 부인, 노씨 부인은 들으시오. 나라에선 광해군이 물러나고 새로운 임금(인조)이 즉위하셨소. 대비마마께선 노씨 부인을 모셔 오라 하셨으니 어서 준비를 하시오.”

    “아, 어떻게 이런 일이….”

    주모, 아니 노씨 부인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노씨 부인은 인목대비의 어머니이자 좌의정이었던 김제남 대감의 부인이었습니다. 김제남은 폭정을 하는 광해군에게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일가친척들도 사형을 당했고, 여자들은 노비 신분으로 떨어졌습니다. 노씨 부인은 역적 김제남의 부인이라고 유배형이 내려졌습니다. 그래서 멀리 제주도로 와서 10여 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던 것입니다.

    사신들은 바닷가에 닿은 뒤 관덕정에 가서 머물렀습니다. 노씨 부인은 금부도사를 따라 관덕정으로 갔습니다.

    노씨 부인의 일로 제주도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자그마한 술집 주모가 인목대비의 어머니이자 좌의정 대감의 부인이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튿날 노씨 부인은 사신 일행과 함께 배를 타고 제주도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그 뒤 제주도 사람들은 노씨 부인을 모친, 즉 어머니처럼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에, 그가 팔던 탁주를 ‘모주(母酒)’라고 불렀습니다. ‘어머니 술’이라는 뜻이었습니다.

    한편, 인목대비의 어머니인 노씨 부인이 팔던 탁주를 ‘대비의 어머니가 만든 술’이라는 뜻에서 처음엔 ‘대비모주(大妃母酒)’라고 부르다가 그냥 ‘모주’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지금도 제주도에선 탁주인 막걸리를 모주라 부른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