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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오전 12시 30분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카이스트 생명과학동 3층의 불은 환하게 켜져 있었다. 이곳 유전자변형생물체연구실(LMO·Living Modified Organism)에서 하얀 실험 가운을 입은 석·박사 과정 연구생 20여명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박사 과정 연구원들은 이날 오후 팀 회의에서 발표할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고, 석사 과정 막내들은 실험 준비를 위해 샘플에 미생물 균주(菌株)를 접종했다.
이른바 '랩(LAB)짱'이라 불리는 연구실장 김현욱(28·박사 과정 3년)씨는 후배들이 못 미더운 듯 잔소리를 해댔다. "AP랑 CM은 다 넣은 거 맞지?" 실험에 필요한 미생물 시약을 넣었는지 확인하는 말이다. -
후배들은 곧바로 "네, 넣었어요"라고 답했다. 한 후배는 "만약 안 넣었다고 하면 '랩짱'이 군대에서처럼 마구 혼낸다"고 귀띔했다. "실험 준비가 부실하면 다음날 하루 연구를 망가뜨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게 김씨의 답변이었다.
한밤중이라 선선할 법도 했지만, 실내는 '찜통' 같았다. 연구실 구석에 있는 에어컨의 희망온도를 21도로 맞춰 틀었지만, 실내온도는 29도를 가리켰다. 하루종일 각종 연구 장비에서 뿜어나온 기계열 때문이다. 한 연구생은 "겨울엔 따뜻해서 좋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카이스트에서 가장 많은 성과를 내는 것으로 알려진 이 연구실 '식구' 39명은 이같이 낮이고 밤이고 편할 날이 없다. 주기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딱 맞춰 실험결과를 측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산하려는 물질이나 다루려는 균주에 따라 수십 가지의 다양한 실험이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에 매일 주의 깊게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교내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도 "아차, 샘플링!"을 외치며 연구실로 뛰어가는 일이 잦다.
특히 균주를 발효할 때면 연구실 식구들은 밤새 교대해가며 미생물 덩어리를 쳐다보고 있어야 한다. 거품을 줄여주는 시약을 시간에 맞춰 넣어주지 않으면 실험결과가 엉망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김현욱씨는 "예전에 연구원들이 잠깐 졸았다가 한참 동안 진행된 연구를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다행히 이날은 균주 발효가 없어 연구원들은 새벽 3시쯤 기숙사로 향할 수 있었다.
이 연구실 '식구'들을 이끄는 '대장'은 대사공학(代謝工學·metabolic engineering)의 창시자이자 이 분야 세계 최고 권위자인 이상엽(46) 교수다. 대사공학은 유전자를 조작해 우리가 원하는 플라스틱·바이오연료·화학물질 등을 미생물이 만들도록 하는 것으로, 이 교수는 쇠보다 단단한 플라스틱이나 농약 수치 측정기도 미생물로 만들어냈다.
1994년 생명화학공학과 조교수로 부임해 줄곧 카이스트에서 연구생활을 해온 이 교수는 지난 2007년엔 특훈교수(distinguished professor)로 임명됐다. 특훈교수는 세계적 수준의 연구 업적과 교육 성과를 이룬 교수 중에서 카이스트 최고의 명예와 특별 인센티브를 받게 되는 교수로, 정년 이후에도 비전임으로 계속 임용될 수 있는 제도다. 이 교수는 "내 연구 성과들은 지난 16년간 실력 있는 젊은이들과 함께 차곡차곡 쌓아온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아침해가 떠오르자 이 교수가 말한 '과학 하는 마음을 가진 똑똑하고 열정적인' 연구원들이 다시 하나둘씩 나타났다. 이날 새벽 퇴근한 '막내'를 비롯한 석사 과정 학생들은 연구실 옆 공부방으로 향했다. 일종의 스터디그룹인 공부방 인원은 박사 3명, 박사 과정 6명, 석사 4명 등 총 13명이다. 매일 반복되는 연구 때문에 지칠 대로 지쳤지만 "스스로 공부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긴장감이 이들을 아침 공부에 매달리게 한다.
오전 8시쯤 석사 과정 학생들이 먼저 실험실로 들어갔다. 일일 안전기록부를 펼쳐 확인하고, 전날 준비해놓은 미생물들을 꺼내 항생제를 투여했다. 석사 과정 학생들이 실험 준비를 모두 마치자 박사 및 박사 과정 연구원들이 실험실로 들어섰다. 팽팽한 긴장감이 점심시간까지 계속됐다.
점심시간을 맞아 실험이 잠시 중단된 사이 공부방 안쪽에선 막내 연구원들이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30분짜리 쪽잠을 자놓지 않으면 밤까지 집중력을 유지할 수 없다"고 식사를 마친 김현욱씨가 조용하게 설명했다. 30분 뒤 부은 눈으로 일어난 석사 과정 연구원은 졸음을 깨기 위한 커피를 마시며 이렇게 말했다.
"고시생들이 7시간 자고 11시간 공부해서 '세븐 일레븐(seven eleven)'이라고 하잖아요. 아마 저희의 삶은 하루 4시간밖에 자지 않았다는 '나폴레옹'이라고 불러도 될 겁니다."
자판기 옆 시계를 쳐다보던 연구원의 눈이 갑자기 커지더니 반 이상 남은 커피를 쓰레기통에 던지고 냅다 연구실로 뛰어갔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이러다간 샘플링할 시간을 놓치겠어요."
[글로벌 명문 카이스트] 유전자변형생물체연구실 "미생물 연구 24시… 우리 사전에 '늦잠'이란 없다"
오현석 기자
socia@chosun.com
정해진 시간에 맞춰 실험 진행 나폴레옹처럼 4시간 수면은 '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