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再修 공화국] [下] 고비용 드는 '재수 광풍'
안석배 기자 sbahn@chosun.com
기사입력 2010.06.21 03:02

재수생 한명 年2000만원 넘게 써… 한해 사회적 손실 6조원
轉科·편입제 경직된 탓, 주변 분위기에 휩쓸린 '묻지마 재수'도 원인… 선진국선 상상 못할 일

  • 재수 끝에 지난 3월 수도권의 한 사립대 의대에 입학한 김모(20)씨는 "재수 1년간 2400만원은 쓴 것 같다"고 했다. 서울 강남 유명학원 종합반 학원비로 매달 70만원을 냈고, 주말 과외비와 인터넷 강의 비용을 합쳐 월 사교육비만 120만원이 넘었다. 여기에다 밥값·간식비며 교통비, 친구 만나서 밥 먹은 돈 등으로 용돈만 매달 70만원을 썼다고 김씨는 말했다.

    김씨가 유난히 사치스러운 것은 아니다. 학원가에선 평균적인 학생이 쓰는 연간 재수 비용을 2000여만원으로 추산한다. 기숙학원에 다니면 재수 비용이 연 3000만원에 이를 수도 있다고 입시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재수 손실 "적게 잡아 연 5조원"

    본지가 연세대 장용석 교수(행정학과)에 의뢰해 '재수 광풍(狂風)'으로 인한 연간 사회경제적 손실을 추산해 보았다. 1인당 재수 비용을 2000만원으로 가정했을 때, 올해 재수생 15만명(추정인원)이 쓰는 연간 총 비용은 3조원에 달한다. 여기에다 재수로 1년 늦게 사회에 진출하는 비용 2조2792억원을 합치면 총 비용이 5조원을 넘는다.

  • 한 학원의 ‘재수생을 위한 대입 성공전략 설명회’에 모인 학생들이 재수 전략 강의를 듣고 있다. 대입 정시모집이 끝나는 1월 말~2월 초에 열리는 재수생 입시 설명회는 매번 수천여명이 몰려들어 대성황을 이룬다. /정인학 인턴기자
    ▲ 한 학원의 ‘재수생을 위한 대입 성공전략 설명회’에 모인 학생들이 재수 전략 강의를 듣고 있다. 대입 정시모집이 끝나는 1월 말~2월 초에 열리는 재수생 입시 설명회는 매번 수천여명이 몰려들어 대성황을 이룬다. /정인학 인턴기자
    장 교수는 "반수생(半修生)은 학원비가 적게 들겠지만, 어차피 1학기 대학 등록금과 기타 용돈이 들어가니 결과적으로는 비슷하다"며 "상당히 보수적으로(적게) 비용을 산출했다"고 설명했다.

    한양대 이영 교수(경제금융학부)는 "재수라는 것은 꼭 안 해도 되고, 학생들 입장에서도 자기계발이나 능력신장은 거의 없이 학벌 랭킹만 바뀌는 제로섬(zero-sum) 게임"이라며 "재수에 드는 비용은 그대로 사회경제적 손실로 온다"고 지적했다.

    "전과·편입 제도 활성화해야"

    우리나라만 유독 많은 학생이 '재수'에 매달리는 것은 잘못 설계된 제도 탓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점수 순으로 대학·학과가 정해지고, 한번 입학하면 반수(半修)나 편입 시험 말고는 대학을 옮길 길이 없기 때문이다.

    서울대 백순근 교수(교육학)는 "학과 정원이 학생들 수요에 따르지 않고 공급자인 교수 위주로 짜여 있다"며 "전과(轉科)나 편입 제도까지 경직돼 있어 마음에 들지 않는 학과에 입학한 학생들이 취업을 위해 재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과는 최고 우등생을 제외하고는 불가능하고, 편입시험은 대학입시만큼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학생들이 차라리 재수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 고려대 김경근 교수(교육학)는 "학생들이 재수를 선택할 때 개인의 여건·목표보다는 학교나 지역 차원의 '분위기'에 많이 휩쓸려가는 것으로 한국교육고용패널(KEEP) 자료 분석에서 드러났다"며 "강남 학교들만 재수율이 유독 높은 것은 '재수 안 하면 이상하다'는 지역 분위기 때문으로 풀이된다"고 말했다.

    건국대 오성삼 교수(교육학)는 편입제도를 활성화하려면 학벌주의를 완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오교수는 "미국에서는 고교 수석 졸업생들이 2년제 대학인 커뮤니티 칼리지(community college)를 갔다가 명문대로 편입하는 경우가 흔하다"며 "우리나라는 편입하거나 대학원을 나와도 최초 합격 대학만 따지는 까닭에 학생들이 대학입시에만 목을 맨다"고 말했다.

    선진국엔 상상 못할 재수 열풍

    지난달 한국을 찾은 미국 스탠퍼드대학 리처드 쇼 입학처장은 "젊은 학생들이 재수를 위해 1년을 허비하는 한국 상황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미국 대학 입학시험에서는 입학사정관들이 학생들의 지적(知的) 열정과 교외 활동실적 등을 가려내 합격생을 뽑는다"고 말했다. SAT(한국의 수능시험에 해당) 성적을 몇점 더 올리는 게 중요하지 않으며, 따라서 재수는 '비효율적인 선택'이라는 설명이었다.

    우리와 같은 '재수 열풍'은 어느 선진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교육전문가들은 지적했다. 대부분 선진국은 고교 졸업생의 대학 진학률이 40~60%대로 우리(84%)보다 낮아 모든 학생이 대학 입시에 '올인'하는 구조가 아닌 데다, 편입 제도가 활성화돼 대학 입학 후 수능을 다시 보는 '반수생'도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일본도 도쿄대·게이오대·와세다대 등 명문대의 입시관문을 뚫는 것은 매우 어려우며 재수·삼수를 하는 학생들이 있다. 윤유숙 지바(千葉)한국교육원장은 "명문대 입시는 치열하지만 모든 학생이 대입시험을 치르는 것도 아니고, 직업교육 시스템도 잘돼 있어 학생들이 비교적 여유가 있다"고 말했다.

    이성호 중앙대 교육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의 재수 붐은 어느 대학, 어느 학과에 입학했느냐에 따라 사회적 위치가 결정된다는 잘못된 고정관념 때문에 생긴 것"이라며 "학생들이 좀 더 진취적인 사고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파란눈의 교사 "'작품의 주제' 묻는 한국교육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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