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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개봉한 영화 '전우치'를 참으로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난다. 재미가 남긴 긴 여운에 비해 영화의 줄거리는 매우 단순했다. 전우치라는 영웅이 위기에 빠진 세상을 구출하는 것이 전부였다. 따지고 보면 허균의 홍길동전이나, 한 때 유행했던 어린이 드라마 '후레시맨'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의 기본 플롯과도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이와 같은 고전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에 등장했던 '그'들은 아무리 죽을만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죽지 않고, 무시무시한 악당에게 용감무쌍히 마주서서는 일반인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놀라운 재주로 정의를 실현해 우리 속을 후련하게 해준다.
하지만 아쉽게도 정작 우리를 후련하게 해주는 그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긴 여운을 갖지 못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그와 같은 영웅에 의한, 영웅을 위한, 영웅의 이야기를 단지 '킬링타임(시간 때우기)'용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 그 영웅들이 추구하는 '정의'라는 가치의 본질적 의미나 숭고함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물론 그들이 이루려 했던 '정의로움'이란 그리 난해하지 않다. 사회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힘없는 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준다거나 이 세계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흔들려는 악의 무리를 응징하는 것이 그들이 추구하는 정의로움의 핵심이다. 어느 경우라 하더라도 결국은 자신들의 정당한 몫을 누군가에게 빼앗긴 상황을 극복하고자 애쓰는 것, 강탈자들이 빼앗은 것을 원래대로 돌리는 것이 바로 영웅적인 행동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定義)대로 '각자가 각자의 몫'대로 대접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영웅이 추구하는 정의(正義)인 셈이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홍길동이나 후레시맨과 같은 영웅들이 '위대한' 활약을 한다고 해도 그리 반갑지만은 않을 성 싶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숭고한 이념을 지향한다. 군주 한 사람의 독단적 결정을, 그것이 합리적인 것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맹목적으로 뒤따라야 하던 시대와는 다르다. 전근대 사회는 왕에 견줄만한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누군가가 있어야만 부조리를 해결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법에 의한 통치를 원칙으로 삼는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 누군가의 초월적 행위는 단지 무법자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하더라도 보호받아야 할 사회구성원 각자의 몫은 예와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다. 자유주의적 정치이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로크와 루소는 사회계약설을 통해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모든 구성원의 동의'에서 찾는다. 그리고 사회구성원이 정치권력에 동의하는 이유가 바로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자유를 온전하게 보호·보장 받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자연권'은 자유주의 사회에서 구성원들 각자가 누려야할 가장 기본적인 몫인 셈이다.
종합해보건데, 자유민주주의는 구성원들 모두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자유를 보호/보장해야 하며, 그와 같은 목적을 이루는 핵심적 수단으로 법에 의한 통치를 인정하는 이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법을 맹목적으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법이 구성원들의 생명과 재산, 자유와 같은 기본권을 보호·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하는 것이라면 그와 같은 법을 고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은 오히려 시민의식의 기본이다.
최근 국민의 알권리 충족을 위해 전교조 소속 교원의 신상을 인터넷에 공개한 국회위원들의 행동은 위에서 말한 영웅의 행동에 견줄만하다. 자신의 행동을 위법이라고 판시한 법원의 결정이 오히려 법적 정의에 위배된다며 의연하게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법의 명령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또한 '무법자'로 불릴 소지도 있다. 당연히 스스로가 무법자가 아니라 진정으로 영웅적인 결단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려면, 교원들의 자기결정권 보호보다 학부모들의 알권리 보장이 우선이라는 점을 확실히 해줘야 옳다. 아니, 다른 사람에게 제시하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스스로는 그러한 확신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확신에 따라 정의가 실현될 때까지 자신의 저항의 몸짓을 거두지 말았어야 한다. 스스로 내세운 가족애라는 핑계는 자신이 사회적 정의보다 자기 가족의 안위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사람이라고 만천하에 공개한 꼴에 지나지 않는다.
필자는 교총 회원도, 전교조 회원도 아니기에 어느 한 편의 입장을 대변하고픈 생각은 없다. 다만 학부모의 알 권리를 언급하기에 하는 말이다. 교사이기 이전에 두 아이의 학부모로서 필자가 정말로 궁금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내 아이를 담당한 선생님이 어떤 인품과 열정을 지닌 사람인가'하는 것이다. 훌륭한 인품과 뜨거운 열정을 가진 선생님이야 말로 아이들이 학력 신장과 인성 함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줄 진정한 영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교생을 위한 철학카페] '현실의 법' 외면하는 영웅은 정의인가?
전교조 교원 신상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