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배 작가의 서울 이야기] 강감찬 장군의 낙성대 (하)
신현배
기사입력 2010.04.24 22:39

"강물로 거란족을 물리쳐야겠다"

  • 삽화=양동석
    ▲ 삽화=양동석
    양주에서 선정을 베푼 강감찬은 그 뒤 동경(지금의 경주) 유수, 예부시랑, 한림학사, 승지, 중추원사, 이부상서, 서경 유수, 내사시랑평장사를 거쳐 1018년(현종 9년)에는 서북면 행영도통사가 되었습니다.

    당시 고려는 중국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세운 ‘요’로부터 두 차례나 침략을 당했는데, 이해 12월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로 쳐들어왔습니다. 요의 제3차 침입이었습니다. 그러자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에 임명하고,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았습니다.

    “군사 20만8000명을 줄 테니 적을 물리치시오.”

    강감찬은 왕의 명을 받고 흥화진으로 가서 군사들을 영주(지금의 안주)와 흥화진(지금의 의주)에 걸쳐 주둔시켰습니다. 날쌘 군사 1만2000명을 뽑아 흥화진 동쪽 강가에 있는 산속에 숨겨 놓았습니다. 그런 다음 큰 동아줄로 쇠가죽을 꿰어 강물을 막아 놓았습니다.

    잠시 뒤 거란군이 나타났습니다. 거란군 병사들은 천천히 강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고려군은 잠시 기다렸다가 막았던 것을 터뜨렸습니다. 그러자 산더미 같은 강물이 거란군을 덮쳤습니다. 거란군의 3분의 1이 강물에 떠내려가 물고기 밥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산속에 숨겨 놓은 고려군에 의해 가랑잎처럼 쓰러졌습니다. 고려군의 첫 번째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소배압은 남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개경으로 향했습니다. 강감찬은 강민첨을 시켜 그 뒤를 쫓게 했는데 자주(지금의 자산)의 내구산에서 적을 또 크게 무찔렀습니다. 또한 시랑 조원은 마탄에서 거란군을 기습해, 적병 1만여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북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고 이제 쫓기는 신세였습니다. 이들은 귀주 땅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과 맞닥뜨렸습니다. 거란군은 고려군을 당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고려군의 공격을 받고 모래성처럼 무너져 버렸습니다.

    귀주 벌판에는 거란군 병사들의 시체가 산더미같이 쌓여 갔습니다. 고려군의 대승리였습니다. 이 싸움이 그 유명한 ‘귀주대첩’입니다. 거란군 병사 가운데 살아 돌아간 사람은 겨우 수천 명이었습니다.

    이때 강감찬의 나이 72세, 현종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돌아오는 강감찬을 영파역(지금의 의흥)에까지 나와서 맞이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1974년 강감찬의 고향 마을에는 낙성대 공원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공원에는 지금도 나라를 구한 강감찬 장군의 신비한 탄생을 기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끝>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강감찬 장군의 이야기

    강감찬 장군은 워낙 뛰어난 명장이었기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서는 그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용재총화>, <동국여지승람>, <고려사> 열전 등 책을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들도 많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강감찬 장군이 태어날 때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출생에 얽힌 이런 이야기는 위인들의 경우에 흔히 볼 수 있는 설화다.

    강감찬 장군에게는 이런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는 아주 못생겼는데, 스스로 마마신을 불러 얼굴을 얽게 해서 그렇단다. 얼굴이 너무 잘생기면 장래 큰일을 할 수 없다고 말이다. 또 그가 동경 유수가 되어 경주에 부임했을 때, 여름밤에 시끄럽게 우는 개구리 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관원을 시켜 연못에서 제일 큰 개구리를 잡아오게 해 호통을 쳤다. 그러자 그 뒤부터는 연못에서 개구리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나. 이 밖에도 하늘에서 내리치는 벼락을 손으로 꺾었다는 등, 별의별 이야기들이 다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