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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9월 25일 골동품 수집상 정호천씨가 일본 교토 재일교포 2세 김문자씨(女)로부터 입수한 만해 한용운 선생의 회갑기념 족자. 한시(詩) 밑에 초상화를 그려 넣었다. /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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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맑은 새벽에 나무그늘 사이에서 산보할 때에 / 나의 꿈은 작은 별이 되어서 / 당신의 머리 위를 지키고 있겠습니다.
당신이 여름날에 더위를 못 이기어 낮잠을 자거든 /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 / 당신의 주위에 떠돌겠습니다.
당신이 고요한 가을밤에 그윽이 앉아서 글을 볼 때에 / 나의 꿈은 귀뚜라미가 되어서 / 당신의 책상 밑에서 귀똘귀똘 울겠습니다.”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승려, 불교개혁가, 혁명가, 사회운동가였던 만해 한용운(韓龍雲·1879~1944))의 시 ‘나의 꿈’이다.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 대목이 올해 수능의 필적 확인 문구로 제시됐다. 수험생은 매 과목 답안지에 직접 해당 문구를 적는다. 대리 시험 방지를 위해서다.
한용운 시인은 3·1 운동을 이끈 불교계 민족 대표다. 한용운은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부친 한응준(韓應俊)과 모친 온양 방씨(溫陽 方氏) 사이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정옥(貞玉)이고 아명은 유천(裕天), 출가 이후 받은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萬海·卍海)다.
몰락한 양반 사대부 가문 출신으로 부친 한응준은 홍성군 관아의 하급 임시관리였다고 한다. 집안은 몹시 가난했으며 한용운의 유년시절에 관해서는 본인의 술회도 없고 측근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우리 역사넷’에 따르면, 그는 6세부터 성곡리 서당골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9세에 문리에 통달해 신동이라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14세인(1892년)에 전정숙(全貞淑)과 결혼했다(한용운의 결혼 시점이 18세인 1896년이라는 의견도 있다).
한용운은 결혼 이후 아들 한보국(韓保國)을 두고 출가했다. 이에 대해 한용운은 1930년에 처음으로 아들이 있음을 밝혔다.
“구식 조혼시대에 일찍이 장가를 들고 19세 때에 어떤 사정으로 출가하여 중이 되었는데, 한번 집을 떠난 뒤로는 그야말로 승속(僧俗)이 격원(隔遠)하여 집의 소식까지도 알지 못하고, 다만 전편으로 내가 출가할 때 회임 중이던 아내가 생남(生男)하였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기미(己未)시대(1919년)에 나의 이름이 세상에서 많이 알게 되니까 시골에 있던 아들도 내가 저의 친부인 것을 알게 되어 서울로 찾아와 소위 부자가 초면 상봉하게 되었다.”
한용운은 33세였던 1910년에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썼다. 그의 불교개혁 정신을 대표하는 저술일 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불서를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저술로 평가받는다. ‘유신론’은 총 17개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수행 ▲교육 ▲포교 ▲승려의인권과 결혼 등을 다루고 있다.
‘조선불교유신론’은 불교 중흥에 대한 한용운의 이론과 실천을 망라한 최대의 불교시론이라고 한다. 특히 구태의연한 현실 안주의 자세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현재까지 귀감이 되고 있으며, 가장 탁월한 불교 개혁 책이라 평가받고 있다.
한용운은 3·1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최린(崔麟)과 함께 3·1운동을 계획하고 민족세력 규합에 노력했으며,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해 공약3장을 추가했다.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 초안을 수정하면서 마지막 부분에 ‘공약 3장’을 추가한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금일 우리의 차거(此擧)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오, 결코 배타적 감정을 일주하지 말라.
1.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1.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광명정대하게 하라.
한용운은 1926년 한국 근대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인정받은 대표적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했다. 시인은 ‘님의 침묵’에서 충청도 방언과 토속어를 사용했다. 방언 및 토속어 애용과 서민적인 시어의 활용은 ‘님의 침묵’에 민중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한용운은 이외에도 다수의 한시와 시조, 소설을 남겼다. 1935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흑풍(黑風)’은 검열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배경을 청나라를 무대로 하고, 억압에 대한 투쟁정신을 묘사해 총독부에 대한 저항성을 은근히 보여주고 여성해방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삽입하여 반봉건 정신 및 여성도 인격체라는 견해를 설파했다.
1936년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後悔)’를 연재했고 1938년에는 조선일보에 ‘박명(薄命)’을 연재했다. 그의 문학은 험난한 역사를 살아가는 예지와 용기를 가르쳐주며, 현실적인 생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신념과 희망을 불러일으켜 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또한 그의 문학이 한국 문학에서 부족한 요소인 종교적 명상의 진지함과 형이상학적 깊이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총독부는 사회 저명인사들을 회유 전향시켜 전쟁 동원의 나팔수로 활용하고자 했다. 한용운은 일제의 계속되는 감시와 체포, 탄압에도 불구하고 징용이나 보국대, 또는 일본군을 찬양하는 어떠한 글도 쓰지 않고 강연도 하지 않았다. 또 신사 참배와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고, 창씨개명에도 반대했다.
한용운은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성북동 자택 심우장(尋牛莊)에서 냉방으로 생활했다고 한다.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했던 그는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茶毘: 불에 태운다는 뜻으로, 시체를 화장하는 일을 이르는 말)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이 안치됐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追敍)되었다.
참고자료=국사편찬위원회의 ‘우리 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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