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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은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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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책은 얇고 간결한 책이다. 대부분 글이 적고 어떨 때는 글이 없이 그림만 있는 경우도 있다. 그림책이 읽기 쉬운 책이라는 생각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책 속의 문장이 조금만 길어지면 읽기를 머뭇거리는 어린이들도 그림책은 두려움 없이 신나게 책장을 넘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깊숙한 뜻까지 발견하면서 그림책을 읽는 일이 생각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작가들은 그림책 안에 독자가 마음껏 누리고 상상할 수 있는 다양한 기호를 숨겨둔다. 그 기호를 찾는 일은 책읽기에 익숙한 어른보다 어린이가 더 잘할 때가 종종 있다. 한편 어른들은 글자 중심으로 서둘러서 훑어보느라 그림에 담긴 수수께끼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지나치기도 하고 단서를 글 안에서만 찾으려 해서 정작 이야기의 중요한 흐름을 놓칠 때도 있다. 그림의 해석 방향은 글에 비해서 다양하게 열려 있고 서사는 중의적이어서 어느 인물의 시선에서 보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정반대 방향으로 진행된다 해도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린이들은 상대적으로 사고가 유연해서 통상적인 의미에 갇히지 않고 그림 자체의 움직임에 마음을 기울이기 때문에 어른들은 너무 간단하다고 말하는 책을 오래오래 붙잡고 읽는다. 그림책의 제 1 독자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카슨 엘리스의 그림책들은 그러한 어린이 독자들에게 높은 자부심을 안겨줄 재미있는 이미지가 가득한 보물상자 같은 작품들이다. 2015년 발간되었고 2016년 '우리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그림책 'Home'은 얼핏 보기에 집의 종류를 다룬 책처럼 보인다. 그러나 담긴 의미는 더 풍부하다. 독자는 굴뚝에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작가 자신의 시골집에서 출발해 물에 잠겨버린 고대 아틀란티스의 집, 우주 공간의 집까지 상상할 수 있는 각양각색의 집을 둘러본다. 이 여정은 한 마리 새의 시선으로 전개되는데 덕분에 사람의 삶이 동물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도 살 수 있어?”라는 질문은 이 그림책 앞에서 부드럽게 무너지며 존재의 다양성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진다.
2016년 발간되었고 2017년 '홀라홀라 추추추'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그림책 'Du Iz Tak?'은 언어의 자의성에 대한 그림책이다. 작가는 자신의 정원을 스스로 가꾸는 사람인데 정원에서 들었던 벌레들의 소리를 조합해 ‘곤충어’라는 창작 언어를 만들었다. 곤충어로만 된 이 그림책은 각 나라의 번역가들이 상상한 각국의 곤충어로 번역되었으며 그림 읽기의 달인 어린이들은 작품 속 가느다란 대벌레가 일어서서 감탄하는 장면까지 빼놓지 않고 찾아낸다. 그리고 어른들이 왜 곤충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안타까워하며 곤충어로 된 대화를 신나게 읽는다.
아직 우리나라에 번역되지 않았지만 가장 흥미로운 책은 2020년작 'In the Half Room'이다. 이 책은 완전성과 불완전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걸작이다. 표지를 보면 절반의 식탁 위에 절반의 꽃병이 놓인 절반의 방에 절반의 고양이가 앉아서 절반의 창문 밖에 뜬 반달을 바라본다. 절반은 결핍이나 결여라는 생각은 그림이 보여주는 절묘한 안정감과 함께 흔들린다. 카펫 같은 사물이 절반일 때는 평온하던 감정도 사람과 고양이가 절반만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출렁거린다. 절반의 사람은 자신과 닮은 절반의 사람을 만나 훌쩍 여행을 떠나버린다. 그런데 그들이 합쳐져 하나가 되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2차원의 그림책을 보는 독자는 눈에 보이는 평면의 뒷면, 나머지 절반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절반의 고양이가 절반의 고양이와 노는 장면에 이르면서 그림책은 절정으로 향한다. 고양이의 머리는 꼬리를, 세상의 빛은 그늘을, 인생의 시작은 끝을 만나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잘 자요!”라는 작가의 평온한 끝인사는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되묻는다. 그리고 하나가 아니어도, 하나로 연결되지 않아도 즐거운 삶에 대해서 말한다.
카슨 엘리스는 그동안 발표한 세 권의 그림책으로 두툼한 책 못지않은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를 재미있게 전한다. 시각 예술 경험이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멋진 사례다. 철학은 어린이의 좋은 친구이며 그림책은 그들의 우정을 이렇게 쉽고 자연스럽게 돕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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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부영 신작 그림책 'In the Half Room' / 제이와이북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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