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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이해하고 싶긴 하지만, 그리고 내 마음을 앗아간 남자들 때문에 고통스러워한 적도 있지만 나는 이제 깨닫는다. 내 영혼에 닿은 사람들은 내 육체를 일깨우지 못했고 내 육체를 탐닉한 사람들은 내 영혼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 파울로 코엘료,《11분》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아자니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을 담고 있는 영화,《중독된 사랑》(1993)에는 사랑에 중독된 여자가 주인공이다. 톱모델 페넬로프(이사벨 아자니 역)는 어느 날 죠르쥬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허영과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그녀는 그를 사랑하면서 도취되어 있던 나르시스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조르쥬는 떠나고 그녀는 이별의 후유증으로 고통스러워한다. 자신이 사랑에 중독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마음의 극장Theaters of the Mind》의 저자인 심리학자 조이스 맥두걸은 우리가 마약이나 알코올에 중독되듯 사람에게도 중독된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대상과의 균형감이 무너지면 사랑은 이내 집착이 된다. 사람중독자는 중독대상인 한 사람에게 비정상적인 과도한 사랑공세를 펼친다. 스토킹은 사랑중독이 퇴행적으로 고착된 상태이다.
지금은 미친 사랑의 중독시대이다. ‘사람중독’이 아니라, ‘사랑중독’을 거론하는 것은 내가 판단하기에, 사랑중독자 대부분은 한 사람에 대해 숭고하고 지순한, 혹은 스토커 같은 집착과 갈망을 느낀다기보다는 단지 사랑행위가 가져다주는 달콤한 감정적 쾌락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랑 말고도 정치나 사회, 인권, 페미니즘이 중요하던 시절은 이제 종말을 고했고, 사랑과 돈이면 세상 거의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시절이 왔다. 그나마 돈보다 덜 사악한 사랑 운운하는 것이 마음을 보호하는 일이다. 그래서 TV를 틀면 온통 사랑타령이다. 사랑타령이 아닌 노래, 드라마, 광고, 교양프로를 찾기가 힘들 정도다. 오히려 사랑 이야기가 빠져야 조금 더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시절이다. 하지만 도저하게 흘러넘치는 것은 역시 사랑이다.
내 경험도 다르지 않다. 2-30대들과 상담을 하거나 이야기해보면 그들은 사랑이 삶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많다. 그녀는, 혹은 그는 왜 그럴까 생각한다. 그들은 외롭다. 마음을 나눌 만한 친구나 지인도 없고, 깊은 소통이 시작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연애이다. 사랑 말고는 정서적 충족 대상을 발견하기 어려운 까닭에 사랑에 집착한다.
심리학자 조지 베일런트는 “인간은 정교한 사회적 결속(무조건적인 애착, 용서, 감사, 다정한 시선 마주치기가 그 특징이다)에 의해 생존해왔다”고 말한다. 그는 누군가와 장기간의 애착만이 깊은 상처를 치유한다고 말한다. 요즘 청춘들은 안타깝게도 깊이 있는 소통과 농도 짙은 애착을 발견할 수 있는 대상이 매우 한정적이다.
청춘들이 사랑에 집착하는 까닭은 자신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시선을 마주쳐줄 사람이 사라져가기 때문이다. 청춘만의 문제는 아니다. 세상이 갈수록 불안해지고, 서로에 대한 불신이 깊어갈수록 우리 모두는 더욱 연인이나 배우자, 자식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사랑은 넘쳐나지만, 영원한 사랑은 점점 증발되어 간다. 문제는 그것이다. 얼마 전 《결혼 없는 청춘》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결혼에 대한 사회적 압력이 심해지면서 한중일 아시아 3국 젊은이들 상당수가 결혼을 포기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회가 지속적인 사랑을 맺지 못하도록, 청춘에게 가하는 압력이 느껴졌다. 이제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 아니라 넘어야 할 높은 벽이다. 대개는 결혼이 불가능한 사랑들이라서, 그 사랑들은 더 초라하다. 결혼을 미루거나 포기한 이상, 길어질 수밖에 없는 개인의 연애기간은 더 많은 사랑사건을 만든다. 하지만 사랑이 느는 만큼 개인이 맞이해야 할 이별도 몇 배 이상 늘었다. 반복되는 연인과의 이별에서 마음을 다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사람은 외면하고 사랑에 집착한다. 사랑은 홍수처럼 넘쳐나지만 사랑의 결실은 없다. 그러니 사람들은 스쳐지나가는 연인들에 집중하기보다는 사랑을 하며 느끼는 애착의 감정에만 더 집착하는 것이다. 사랑만 남고, 사람은 사라진 것이다.
결혼이 사랑의 종착점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누군가와 긴 사랑을 나눌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으니, 지나간 애인을 안타까워하고 그리워하기보다는 다시 사랑을 채워줄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들의 일회용 사랑으로 전락한 것이다.
지하철 안, TV속, 영화나 드라마, 흘러나오는 유행가 가사, 여기저기서 섬광처럼 뻔쩍이는 사랑의 불꽃들이 단지 불꽃놀이 화약처럼 찰나적인 놀이일 뿐이라는 생각이 허무감을 자아낸다. 아마도 지금 불안하니까, 더 사랑에 집착하지만 사랑 안에서 사람들은 사라져버리는 비극적인 장면은 이 세기의 트렌트가 될 것이다.
박민근독서치료연구소 소장 / ≪당신이 이기지 못할 상처는 없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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