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근의 심리치료] 철학상담과 독서치료의 환상적인 만남
입력 2014.09.15 10:41
  • 스무 살 무렵 대학 입시를 목전에 두고, 철학과를 갈지, 국문과를 갈지 몹시 고민했다. 당시는 복수 전공 같은 제도가 없어 결국 국문과를 택했지만, 마음만은 철학도 함께 전공한다는 심산으로 대학과 대학원 시절 내내 철학공부에 열성이었다. 남들은 아무 쓸 짝이 없다고들 하는 철학 공부는 사실 내게는 생명을 구한 일이었다. 교수들 아귀다툼에 쫓겨나 시골로 귀향하고, 나는 몹시 심한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 누구에게도 속내를 드러내진 못했지만, 죽고만 싶어 ‘자살’을 꿈꾼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고들 했던 철학공부가 나를 그 가파른 벼랑에서 건져 올렸다. 빅터 프랭클은 기존 심리치료의 한계를 절감하며 마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생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 회복하는 상담치료인 ‘로고테라피’를 주창한 바 있다. 죽음의 유혹에 시달렸던 내게 가장 충격적인 의미와 생의 가치를 가져다준 이가 바로 빅터 프랭클이었다. 단 한 번뿐인 이 생에서 너의 삶이 존재하는 의미를 발견하라던 그의 외침. 상아탑에 앉아 지적 유희에 도취되어 있는 다른 유령 학자들과 달리, 내게 그의, 아우슈비츠에서 경험한 생의 감각 회복체험은 진실로 실감나는 삶의 증거들을 제시했었다.

    최근 죽은 인문학을 되살리고자 하는, 뜻있는 학자들이 철학상담이나 인문치료의 부활과 부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대중과 동떨어진 철학 연구가 아닌, 대중의 삶에서 그들의 회복과 성장의 가능성을 철학에서 발견하고자 한다. 심리상담의 아성을 지키려는 옹졸한 이들이 철학의 치유 효과를 폄하하기도 하고, 철학자들이 심리상담가들이 단지 가벼운 위안과 기분전환을 줄 뿐이라고 비난하기도 하는 불협화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임상에서 내가 경험한 바로는, 분명 철학적 사유와 심리상담이 융합하면 아주 특별하고 탁월한 치유지대를 형성할 수 있다. 니체는 위대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철학이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방법적 단초들을 마련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혹자는 프로이드가 니체의 사유를 한껏 모방하며 정신분석학이라는 새로운 장을 창안했다고도 말한다. 심리학의 고전인 ≪심리학의 원리≫의 저자이자 미 심리학의 아버지로 칭송되는 윌리엄 제임스는 한편으로는 실용주의 철학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애초 철학과 심리학은 그 발생에 있어 이렇게 친족관계를 맺고 있다.

    어찌되었든, 나는 독서치료에서 내담자들에게 자주 철학책을 권한다. 내담자가 겪고 있는 심리문제의 뿌리에 생각의 병이 존재할 경우에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정서문제만을 치료하는 것은 별달리 효과가 없는 까닭이다. 근한 예로 돈 걱정 때문에 우울증에 빠진 사람이라면, 삶의 한 구성요소인 물질적 풍요가 자기 인생에 가져다주는 득과 실을 차근차근 따져보는 성찰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에는 그가 가진 가치관의 틀과 바탕을 제대로 되살피는 사유와 사색이 반드시 요구될 것이다. 그러니 마음이 아픈 이에게 철학적 고언을 강요하는 것은 철학자의 독설이 될 수 있으며, 심리상담을 위해 철학적 사색 없이 심리학만을 공부하는 상담가는 ‘가짜’일 따름임을 유념해야 한다. 내가 흔히 독서치료에 쓰기도 하지만, 프랑스 고등학생을 위한 미셸 옹프레의 ≪원숭이는 왜 철학교사가 될 수 없을까≫ 같은 책은 좋은 철학적 치유서라고 할 수 있다. 일견 프랑스 아이들의 철학적 사고 수준이 이 정도로 높을까 부러움을 느끼게도 하는 책이다.

    최근 상담한 고등학생 민준이의 경우도 우울증의 주된 이유가 지나치게 염세적인 인생관 때문이었다. 늘 못난 사람으로 살아온 민준이는 자신이 살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슬픔이 가득한 민준이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일도 필요했지만, 인생은 그렇게까지 비관적이지도, 또 더할 나위 없이 낙관적이지도 않은 중립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줄 필요가 있었다. 민준이는 나와 인생관과 가치관에 대한 대화를 더 많이 나누었는데, 비슷한 시기에 우울증 상담을 받은 동갑의 여학생보다 훨씬 빨리 회복되었다. 철학과, 독서를 통한 심리치료가 잘 어우러진 상담은 다른 어떤 심리치료보다도 높은 치료효과를 보인다는 믿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던 경험이었다.  

    박민근독서치료연구소 소장 /  ≪당신이 이기지 못할 상처는 없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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