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나를 알던 사람 가운데는 문학비평가가 되겠다던 사람이 어쩌다 심리치료를 하게 되었냐고 그 이유를 궁금해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는 살며 두 번의 우울증을 앓았다. 한 번은 중학교 3학년 때였고, 또 한 번은 30살 무렵이었다. 모두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불행한 생각을 증폭시키면서 걷잡을 수 없이 심해졌다.
어릴 때부터 미술에 소질이 있던 나는 화가가 되는 일에 한 번도 의심과 흔들림이 없이 살았다. 하지만 철이 들기 시작한 중학교 3학년쯤부터 나는 집의 형편을 걱정하기 시작했고, 적지 않은 돈이 드는 미술도구나 용품을 사달라고 하기가 못내 부담스러워졌다. 급기야 부모님께서는 내게 형편이 어려우니 미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느냐는 권유를 했고, 나는 모든 것이 운명이러니 하며 그 상황을 받아들였다. 당시 나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하지만 절망을 느낀 순간,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우울감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하지 않던 방황을 했고, 하지 않던 문제행동을 했다. 서른 즈음의 우울증은 더 심한 것이었다. 문학비평가의 꿈을 안고 공부하던 나는 몇몇 뜻밖의 사건과 운명의 뒤틀림에 빛을 잃고 말았다. 힘이 센 양반들의 힘겨루기에서 한낱 대학원생이었던 나는 파리 같은 가치였다. 국문학과를 나온 주제에 중국유학을 가겠다, 독일유학을 가겠다며 객기를 부리기도 하고, 새벽까지 몸에 받지도 않는 술을 마시며 운명을 한탄하기도 했다.
힘들어하던 나는 결국 충청북도에 살고 있던 형님 댁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극한의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 그런데 그때 두 번 모두 나를 구원했던 것은 거대한 문학의 힘이었다. 중학교 3학년짜리 방황하던 소년을 되살린 건 헤르만 헤세와 어니스트 헤밍웨이였다. 특히 『수레바퀴 밑에서』와 『노인과 바다』는 마치 성전처럼 다가왔고, 나는 문학의 힘을 빌려 서서히 회복될 수 있었으며, 문학을 탐구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소중한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그 거룩한 치유 덕분에 문학에 열정을 바치는 삶이 내 청춘을 충만함으로 아로새겼다.
서른 살의 좌절은 깊었고, 절망적이었으며, 때로 절대 불행처럼 믿어졌다. 하지만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시 나는 청소년 시절 나를 살렸던 그 책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으며, 그 힘으로 서서히 나를 일으켜 세웠다. 다시 헤르만 헤세와 헤밍웨이가 운명을 이해하라고 다독거렸으며, 니체의 시들과 하이데거의 수필들이 운명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쳤으며, 불교적 전언들이 무소의 뿔처럼 살아갈 용기를 심어주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문학이 사람의 깊은 상처마저도 치유하는 힘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문학으로 타인의 내적 성장을 돕는 일에 전념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상담을 하면서 가끔 이런 내 개인적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아이가 커다란 불행을 맞이했을 때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던진다. 특히 아이를 품안에 꼭 싸서 세상에 내놓길 두려워하고 번민하는 엄마들을 만나면 더 짓궂게 질문을 이어간다.
엄마의 낡은 우산이 언제까지나 아이의 자라는 몸을 다 덮어줄 수는 없다. 살며 비와 눈보라는 계속 될 것이고, 아이는 때로 맨몸으로 그 역경과 고난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무엇이, 어떤 사람이 아이에게 역경과 시련을 뚫고 나갈 힘을 줄 수 있을까?
나는 늘 가슴 깊이, 그리고 진심으로 내 아버지를 존경하고 감사한다. 아버지는 늘 자식의 읽기 능력을 근심스러워했고, ‘하루 3장의 책을 읽지 않고 잠드는 일이 인간의 도리를 어긋난다’고 가르쳤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가르침 덕에 겨우 중학교 3학년 밖에 안 되어서 『노인과 바다』에 숨은 ‘인생을 이해하고 운명과 맞서라’ 라는 의미를 깨달을 만큼 똑똑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화가가 될 만큼의 경제적 지원을 해줄 수 없는 ‘무능한’ 부모였지만, 내가 어린 나이에 헤르만 헤세를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끈 교육적 ‘유능함’을 가진 분이었다.
요즘의 부모들은 바쁜 나머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이 가르침을 잠시 망각한다. 아이가 성장함에 있어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일지, 아이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잊고 지낸다. 한번은 아버지가 외제 아웃도어 잠바와 고급 스마트폰을 사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부모와의 말다툼 끝에 가출을 하게 된 아이와 상담한 적이 있다. 아이는 숙식을 제공하는 한 주유소에서 그것을 살 돈을 벌겠다고 객기를 부리고 있었다. 상담실에 끌려온 아이는 희망을 모르고 있었다.
어디서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니 남들처럼 살지 못하는 자기 처지만 한탄했다. 아이의 아버지는 인생의 무게에 찌들어 있었고, 본인은 피땀을 흘리며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애쓰는데, 아무 공이 돌아오지 않자 허탈해하고 있었다. 여유롭지 않은 형편에 굳이 딸을 상담까지 받게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어루만지며, 못난 아버지가 되지 않으려고 애쓰지 말고, 아이가 자신이 세상의 중심임을 깨닫게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아이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판단에 현혹되지 않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자고 상의했다. 그리고 마음에 ‘자기중심감’을 심어주기 위해서 아이가 보고 깨달아야 할 이야기들이 있다고도 했다. 나와 상담하는 엄마들은 모두 아이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아이가 행복할 수 있을지는 항상 잘 모르겠다며 걱정한다.
아이의 행복을 바라지만 오히려 아이가 불행해지는 상황으로 이끄는 엄마들이 많다. 아이가 쓰러지지 않도록 늘 손을 붙잡고 있다가 온실 속의 화초보다 더 연약한 아이를 만드는 엄마도 있고, 남보다 앞서라고 남을 이기라고 거친 언어로 아이를 독려하다가 아이의 의욕을 다 소진시켜버리는 엄마도 있으며, 부정적인 말로 인생에 대한 비관을 너무 빨리 심어주어 세상을 두려워하는 아이를 만드는 엄마도 있다.
또 물질들로 아이의 껍데기를 치장하다가 물질이 아니면 움직이지 못하는 로봇 같은 아이를 만드는 엄마도 있다. 자신이 남과 섞이기를 싫어해 아이마저 세상의 아이들과 섞이지 못하게 만들어버려 친구와 지내는 법을 모르는 아이로 키우는 엄마들도 있다.
엄마가 눈이 멀어서는 안 된다. 엄마에게 다시 한 번 문학수업이 필요한 이유를 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조지 베일런트 교수는 인간은 죽을 때까지 성장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는 행복을 영위하는 최선의 수단 가운데 하나는 끊임없는 배움의 자세라고 말한다. 백 년을 산다고 해도 우리가 다 알지 못할 세상의 비의와 고결한 가치는 늘 책의 저 깊은 곳에 ‘실존’한다. 엄마가 그 실존의 비밀들을 매일 탐구하지 않으면 아이에게 가치 있는 행복의 방도를 알려줄 길은 있을 수 없다.
엇나가기 쉬운 인간의 야성을 바로 잡는 것은 언제나 책의 높은 의미와 가치들이다. 세상의 모든 진리를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이고, 그 한계가 비록 늘 슬픔을 자아내는 것이지만, 알고자 하고 배우고자 하는 인간은 이 슬픔을 능히 이겨낼 수 있다. 상담마다 내가 마음의 심연을 다독거리는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을 엄마에게 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이를 책으로 기르는 엄마들은 무지개의 끝자락을 반드시 잡을 수 있다. 때로 상실감과 눈물을 쏟아내는 역경이나 불행 앞에서도 아이를 지킬 내적 힘, 마음의 근육을 키워나갈 수 있다.
책을 읽는 엄마는 아름답다. 책을 읽는 엄마는 아이가 자라는 내내 가장 오래 아이를 바르게 이끌 삶의 선생님이며, 아이에게 건네는 좋은 책 한 권은 아이가 인생의 무게를 충분히 짊어질 수 있는 튼튼한 심리근육을 만드는 열쇠이자 자양분이 된다. 모든 엄마가 ‘유능한’ 선생님이 되어 아이와 함께 아이가 진정한 행복을 깨닫는 내적 성장기를 동행하길 고대한다.
행복은 불행을 피하는 일이 아니라, 불행조차 행복으로 바꾸는 마음의 역능(力能)에 있다. 아이에게 행복을 발견하고 불행을 능가하는 법을 알려주는 지혜로운 엄마가 되기를 기원한다. 아이를 사랑한다면 책을 통해 불행을 끌어안는 아이로 키워야 하는 것이다.헬로스마일 소아청소년 심리센터 원장 / 퇴계문학치유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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