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위인전] 가천의과대 뇌과학연구소장 조장희 박사
입력 2010.12.07 09:44
버려진 배터리로 '에디슨 꿈' 키워
집 한구석에 실험실 만들어 전기 만들고 라디오도 조립
"새로운 걸 찾아 끝없이 도전… 열심히 하다보면 못할 게 없어요"
  • 조장희 박사(가천의과학대학교 뇌과학연구소장·74세)는 지나온 삶에 만족한다고 했다. 스스로를 “가장 행복한 과학자”라고 스스럼없이 말할 만큼 자부심이 넘쳤다. 세계적인 과학자인 그는 지난 2005년 고국에 돌아와 뇌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그를 ‘모셔오기’ 위해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은 수백억원을 들여 대규모 연구소를 지었다. 국내 교수 중 최고 연봉을 약속한 건 물론, 15년의 연구기간을 보장해줬다. 지난 2일 만난 조 박사는 때론 자상한 할아버지처럼, 때론 세계적인 학자다운 태도로 한 시간 넘게 자신의 인생 얘길 들려줬다.

    ◆중1 때 6·25 전쟁… 대구서 담배 장사로 생계 이어

    내 고향은 황해도예요. 지금은 북한땅이지요. 1936년에 태어나 세 살 때 서울로 이사를 왔어요. 아버지는 중동중학교를 나온 현대화된 분이었는데 서울에 와서 제약사업을 했지요.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4년, 유치원을 다니다가 다시 고향으로 갔어요. 서울이 너무 위험했거든요. 고향에서 해방을 맞았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38선이 점점 굳어지는거예요. 놀란 할아버지께서 “부모님이 계신 서울로 얼른 돌아가라”고  하셨어요. 서리가 내릴 때였으니까 아마 11월쯤 됐을 거예요. 할아버지가 구해주신 사람의 도움으로 38선을 넘었고 개성에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어요. 조금만 늦었어도 내려오지 못했을 거예요.

    중학교 1학년 때 6·25 전쟁이 터졌어요. 전쟁의 연속이었지요. 이듬해 1월 온 가족이 열차 지붕 꼭대기에 앉아 대구로 피란을 갔어요. 그곳에서 3년을 살았어요. 하루 한 끼도 먹기 힘든 생활이 이어졌지요. 돈을 벌어야 했어요. 담배 장사도 하고, 미군 물건도 떼어다 팔고…. 다른 아이들보다 영어가 유창해서인지 제법 장사가 잘됐어요.

    ◆전기 만들고 라디오 조립하며 ‘에디슨’ 을 꿈꾸다

    서울 재동초등학교에 입학했다가 3학년 때 남산초등학교로 전학했어요. 공부엔 별 관심이 없었죠. 당시만 해도 남산은 음침해 사람들이 오가길 꺼렸지요. 하지만 난 혼자 올라가 놀길 좋아했어요.

  • 어린 시절 버려진 배터리로 ‘전기 장난’ 을 치던 조장희 박사는 CT·PET·MRI 등 인체영상기기의 세계적 선구자로 우뚝 올라섰다. 그는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야 행복하며, 어린이들도 그런 일을 찾길 바란다”고 말했다. / 인천=남정탁 기자 jungtak2@chosun.com
  • 하루는 남산에서 미군이 버리고 간 배터리를 발견했어요. 그걸 주워다가 전등에 연결하곤 했지요. 나중엔 쓸 만한 배터리를 모아 청계천에 내다팔고 라디오 부품을 사 라디오를 만들었어요. 설계도가 필요해 과학잡지도 열심히 봤어요. 그때 어렴풋이 ‘에디슨 같은 발명가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마 초등 3~4학년 때였을 거예요.

    집 한구석에 실험실도 만들었어요. 온갖 부품을 갖다놓고 친구들과 이것저것 만들곤 했지요. 그런데 6학년 2학기의 어느날, 실험실이 폐쇄됐어요. 선생님이었던 외삼촌이 “장난은 그만 치고 중학교 입시 공부나 하라”며 닫아버리신 거였어요. 그땐 소위 명문 중학교의 입시 경쟁이 아주 치열했어요. 특히 서울사대부설중학교는 특차로 신입생을 모집해 아주 들어가기 어려웠지요. 최고 성적은 아니었는데 운 좋게도 거길 붙었어요.

    사실 내가 가려던 학교는 따로 있었어요. ‘무선중학교’라고, 일종의 기술학교였지요. 시험 안 치고 들어가는 쉬운 학교였는데 ‘에디슨이 되려면 그런 학교가 적당하다’고 생각했어요. 중학교에서도 물리반에 들어갔어요. ‘전기 장난’을 계속하고 싶었거든요.

    ◆국비로 떠난 스웨덴 유학서 ‘공부 재미’ 발견해

    피란길에서 돌아와 서울에서 장사를 하다가 3년 만에 학교에 돌아갔어요. 하지만 공백 기간이 워낙 길었던 데다 실력 좋은 아이들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어요. 어떨 땐 시험에서 빵점을 맞기도 했죠. 1년쯤 지나 겨우 회복됐고 대학 갈 때가 됐어요. ‘네 실력으론 어림없다’며 선생님이 말렸지만 이 악물고 공부해 시험을 봤고 서울대 공대에 입학할 수 있었어요. 공대라면 좋아하는 ‘전기 장난’을 맘껏 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공부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건 군대를 다녀온 후부터였어요. 대학원에 진학했고 스웨덴으로 1년짜리 유학을 떠났어요. 그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어요. 아주 감명 깊었고 10년간 머물며 공부에 열중했어요. 휴일도, 밤낮도 없는 생활의 연속이었지요.

    본래 가만히 있질 못하는 성격이에요. 자꾸 뭔가 새로운 것에 도전해 만들어내지요. 이제까지 ‘성과’ 라고 할 만한것들은 모두 그렇게 탄생했어요. 친구중엔 30년 이상 하나만 연구하는 이들도 있어요. 물론 어떤 게 좋은 건진 모르겠어요. 하지만 늘 새로운 걸 찾아 끊임없이 연구하는 태도는 학자에게 꼭 필요한 자세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뭔가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니까요.

    ◆국가가 정직 가르쳐야… “자발적 사람이 되세요”

    난 국가가 나서서 어린이들에게 ‘정직’ 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직은 모든 것의 기본이거든요. 실험을 해보면 사람은 거짓말할 때 뇌를 굉장히 많이 써요. 에너지를 낭비하는 거죠. 정직하다는 건 자신의 머리를 (거짓말이 아닌) 공부에 쓸 수 있게 된다는 뜻이기도 해요. 정직은 국가 발전에도 도움이 돼요. 거짓을 감시하느라 쓸데없는 비용을 쓰지 않아도 되니까요.

    또 하나, 자발적인 사람이 되세요. 연구소에 가끔 일류대 학생들이 찾아와요.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자기가 하는 일에 전혀 흥미가 없어요. 어렸을 때 운동을 해서 뇌가 함께 자라야 하는데, 맹목적으로 공부만 하니까 뇌는 자라지 않고 그때그때 필요한 것만 받아들이는 거죠. 그런 사람들은 그걸로 끝이에요. 무슨 일을 하든 자발적인 자세가 참 중요해요.

    >>조장희 박사는

    1936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서울대 공대에서 학사·석사학위를 받았다. 국제원자력기구 장학생으로 선발돼 1966년 스웨덴 웁살라대학에서 응용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웨덴 스톡홀름대학교,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UCLA)·컬럼비아대학교 교수를 지냈고 1978~1997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로도 일했다. 1972년 컴퓨터 단층촬영(CT·Computed Tomography)의 수학적 해법을 밝혀냈으며 1975년 세계에서 처음으로 양전자방출 단층촬영술(PET·Positron Emission Tomography) 원형을 개발했다. 1985년엔 역시 세계 최초로 2테슬라 초전도 자기공명 영상법(MRI·Magnetic Resonance Imaging)을 개발해 ‘한국인 중 노벨상에 가장 근접한 과학자’란 평가를 받고 있다. 1997년 노벨상 예비후보군(群)으로 꼽히는 미국학술원 회원이 됐다. 현재 가천의과학대학교 뇌과학연구소장(석학교수)으로 있으면서 사람의 뇌 기능과 형태 변화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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