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이(대전 버드내초등 4년) 방 책상엔 만화책 몇 권이 꽂혀 있어. ‘창작 보따리’, ‘7일간의 가시 대소동’, ‘전쟁이 끝나고 나서’. 수현이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지. 그런데 제목이 낯설다고? 그럴 수밖에. 모두 수현이 작품이거든. 아무리 만화를 좋아해도 열한 살짜리가 그린 거라니까 흥미가 뚝 떨어진다고? 무시하지 마. 수현이는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부천전국만화공모전에서 2년 연속 초등부 금상을 수상한 ‘실력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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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류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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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권유로 만화일기 쓰며 실력 ‘쑥쑥’
“일기를 만화로 써보는 건 어떨까?” 2년 전 어느 날, 엄마가 수현이에게 이런 제안을 하셨어. 일기 쓰는 걸 너무 지루해하는 딸을 보다못해 하신 말씀이었지.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즐겁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신 거야. 역시 딸을 제일 잘 아는 건 엄마인가 봐.
그날부터 수현이는 일기 쓰는 시간을 즐기게 됐어. 아니, 일상에서 있었던 일을 무조건 만화로 남기게 됐다는 표현이 맞을 거야. 놀이공원에 다녀온 날도, 영화관에서 애니메이션을 본 날도, TV에서 재미있는 드라마를 본 날도 글 대신 여러 컷의 만화로 일기를 썼거든. 그 습관은 지금도 여전해. 물론 만화의 짜임새와 그림은 훨씬 나아졌지만 말야.△또래보다 월등한 실력으로 손해 보기도
엄마가 수현이에게 ‘만화일기’를 권유한 덴 다 이유가 있어. 어릴 때부터 워낙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고, 또 잘 그리는 아이였거든. 다섯 살 때 이미 돼지 뒷모습이나 사람 옆모습을 그럴 듯하게 그려낼 정도였으니 알 만하지? 요즘도 엄마는 당시 일을 떠올리며 감탄하곤 하셔.
뛰어난 그림 실력 때문에 손해를 본 적도 있어. 수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줄곧 교내 그림대회는 모조리 휩쓸었거든. 하지만 외부 대회에선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지. 그림대회 응모작은 우편으로 접수하는 경우가 많잖아. 수현이의 평소 실력을 잘 아는 학교 선생님들은 기꺼이 상을 줬지만 외부 심사위원들은 믿질 못한 거야. 나이에 비해 그림이 너무 뛰어나니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그래서 지난해 만화공모전에 작품을 접수할 때, 엄마는 수현이의 만화일기를 첨부했어. 딸이 또 의심을 받을까 봐 걱정하신 거지. 그 덕분인지 수현이는 지난해 저학년부 금상을, 올해 고학년부 금상을 각각 수상했어. 특히 올해 심사를 맡은 ‘빅뱅스쿨’의 작가 홍승우 씨는 “초등학생 작품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림체가 탄탄하고 숨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구성이 인상적”이라고 칭찬했어.△“만화 잘 그리려 일반 책 많이 읽어요”
그림 실력이 좋다고 해서 다 만화를 그릴 수 있는 건 아냐. 스토리가 단단하지 않으면 제아무리 그림이 빼어나도 독자의 흥미를 끌 수 없는 법이지. 하지만 수현이는 이 부분에서도 거뜬히 ‘합격점’을 받았어. ‘이야기 구성이 인상적’이란 홍승우 작가의 심사평만 봐도 알 수 있지? 비결은 바로 독서야. 수현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는 하루에도 수십 권씩 딸에게 책을 읽어줬거든. 한글을 깨친 후부턴 수현이 혼자서도 많은 책을 읽었어.
요즘도 수현이는 누구나 알아주는 책벌레야. 엄마가 책 사준다는 얘기만 하면 뭐든 열심일 정도로 말야. 또 만화를 제일 좋아하긴 하지만 더 많이 읽는 책은 만화책이 아닌 일반 책이야. 상상력을 기르는 덴 일반 책이 더 좋다는 얘길 많이 들었거든. 책을 읽을 땐 항상 ‘나라면 등장인물을 어떻게 그릴까?’ 생각해. 다 읽은 후엔 꼭 자신만의 만화로 다시 표현해보곤 하지. 요즘엔 해리포터 시리즈를 ‘김수현 방식’으로 새롭게 해석한 만화를 그리고 있어. 수현이는 물론 친구들도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작품이래.
△자동차 디자이너를 이긴 만화가의 꿈
수현이의 원래 꿈은 산업 디자이너였어. 특히 자동차를 좋아해 자동차 디자인을 해보고 싶어했지. 하지만 요즘은 만화가 쪽으로 조금씩 맘이 옮겨가고 있어. 늦은 밤이나 시험기간에도 만화를 몇 컷 그려야 잠이 오는 것, 독학이지만 정식으로 만화 공부에 뛰어든 것도 다 그 때문이야.
수현이는 욕심이 많아. 판타지·역사물·명랑만화·시사만화. 장르를 따지지 않고 모든 분야의 만화를 다 그려내고 싶거든. 수현이의 욕심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의 웃음과 감동도 커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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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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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딴지' 김우영 화백이 수현에게
"독서로 상상력 키우길···"-2학년 때부터 만화를 시작했어요. 화백님도 어릴 때부터 만화를 그리셨어요?
“초등 4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해요. ‘무정한 동생’이란 만화책을 우연히 보곤 그걸 공책에 그렸어요. 친구들이 돌려보면서 재미있어했죠. 그런데 당시만 해도 공책이 귀하던 때라 한 권뿐인 공책을 만화로 채워버려 난감했어요. 더구나 할아버지가 워낙 완고하셔서 그림만 그리면 야단치곤 하셨거든요. 생각 끝에 그 만화를 팔겠다고 내놨는데 사겠다는 친구가 없어 곤란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웃음).”
-서른이 훌쩍 넘어 만화가의 길로 들어서셨다고 들었어요. 만화의 어떤 점이 좋으셨나요?
“그전에도 만화를 그리다가 다른 일을 했어요. 그런데 자꾸 만화가 생각났어요. 독자들을 즐겁고 기쁘게 할 만화를 그려보자는 생각이 간절했죠.”
-만화에서 이야기와 그림 중 어떤 게 더 중요할까요?
“어느 것 하나 덜 중요한 게 없어요. 하지만 굳이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이야기의 비중이 더 크다고 할 수 있겠죠. 같은 소재를 두고도 어떤 이는 재미없게, 어떤 이는 재밌게 표현하는데 그건 절대적으로 이야기의 힘이니까요.”
-좋은 만화를 그리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하죠?
“제 경험을 하나 들려줄게요. 만화가로 이름이 알려지면서 잡지에 연재를 시작했어요. 처음 3~4개월은 잘했어요. 늘 인기순위 1~2위를 달렸으니까요. 그런데 5개월쯤 지나자 소재가 바닥나버렸어요. 나름대로 책을 많이 읽었다고 자부했지만 지식이 부족했던 거죠. 요즘도 늘 책을 가까이하는데 만화가로서 필요한 지식을 쌓기 위해서랍니다.”
-부모님은 자꾸 만화책보다 일반 책을 읽으라고 하세요.
“글로 된 책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되니까요. 다만 책을 읽고 자기 걸로 소화시키는 연습을 하세요. 읽은 내용을 만화로 옮기는 작업을 한다면 훨씬 좋겠죠.
-만화 그리는 건 좋아하는데 색칠은 거의 안 해요. 귀찮거든요.
“색칠은 만화를 죽이기도, 살리기도 해요.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죠. 당연히 훈련을 쌓는 게 좋아요.">>김우영 화백은
18세에 첫 작품 ‘물레방아’를 발표한 후, 서른이 훌쩍 넘어 본격적인 만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거북이’, ‘팔삭둥이’ 등의 작품으로 인기를 얻었고 1990년 3월 1일 소년조선일보에 ‘뚱딴지’를 연재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2004년 ‘제4회 고바우 만화상’을 수상했으며 ‘장보고’, ‘뚱딴지 석기시대’ ‘뚱딴지 만화 명심보감’ 등 40여 종의 책을 펴냈다.
>>취미를 꿈으로 연결시킨 수현이의 비법
1단계: 매일 조금씩이라도 만화 그리기
2단계: 책 읽을 때 등장인물을 만화로 그려보기
3단계: 가족·친구·선생님 등 주변 사람들의 특징 잘 살핀 후 그려보기
4단계: 전국 대회에 참가해 실력 가늠하기
5단계: 그림만큼이나 글쓰기도 열심히 하기
판타지부터 명랑·역사물까지··· "장르 넘나드는 만화가 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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