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함기선 한서대 총장 “모방할 수 없는 특별한 대학을 세우고 싶었다”
입력 2024.03.18 14:02
- ‘2024 대한민국 교육대상’ 교육인물 부문 선정
- 농부를 꿈꾸던 어린 소년, 의사에서 대학 설립자가 되기까지
  • 함기선 한서대 총장. / 장희주 기자.
  • “한 사람의 의사는 한정된 몇 사람의 생명만을 구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의 교육자는 수많은 사람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지 않은가”

    함기선 한서대학교 총장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해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마친 의학박사다. 특히 ‘구순구개열 수술’의 권위자로 불린다. 의사로서 충분한 명예와 부를 이룬 함 총장은 나아가 ‘다른 대학이 모방할 수 없는 특별한 대학을 세우고 싶다’라는 일념 아래 지난 1992년 한서대학교를 설립했다. 이후 그는 한서대학교를 우리나라 최초의 항공 분야 특성화 인증 대학으로 키워내는 등 지난 30여 년을 대학 교육에 매진해왔다. 최근에는 오랜 기간 대한민국 교육 발전을 위해 노력과 수고를 한 인물에게 수여하는 ‘2024 대한민국 교육대상’ 교육인물 부문에 선정되기도 했다. 성형외과의에서 대학 설립자가 되기까지 함기선 총장의 삶을 함께 들여다봤다. 

    ─ 의사 출신의 대학 설립자, 이력이 참 독특해요. 심지어 어릴 적 꿈은 의사도, 교육자도 아닌 ‘농부’였다고요? 

    “맞아요. 고등학생 시절까지 농부가 되고 싶었죠. 중학생 시절 만난 ‘농학계의 거두’ 유달영 박사의 강연을 듣게 되면서 농부라는 꿈을 품게 됐어요. 어느 날 교장 선생님이 경사가 가파른 산지에 사과나무를 심고 있더군요. 그때 유달영 박사님께서 ‘저런 곳에 과수농사를 짓는 것이야말로 부자의 첫걸음이다. 산은 평지보다 1/10 값으로도 매입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죠. 그때부터 제 꿈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과수 농장’을 운영하는 것이 됐습니다.”

    ─ 실제로 고등학교를 농고로 진학했어요. 

    “농부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예산고등학교 과수 원예과에 1등으로 입학했어요. 그런데 농부의 꿈을 이룬다는 게 정말 쉽지 않더라고요. 당시만 하더라도 제대로 된 비료가 없었습니다. 대신 동네마다 퇴비로 쓰기 위해 똥, 오줌을 커다란 통에 모았죠. 모아둔 오물을 퇴비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발효가 되면 이를 똥지게를 짊어지고 옮겨야만 했습니다. 문제는 걸을 때마다 지게가 흔들리면서 제 옷에 똥물이 튀는 겁니다. 아무리 빨아도 그 냄새가 없어지지 않더라고요. 그것을 여러 번 하면서 자꾸 농부의 길이 자신이 없어졌어요.” 

    ─ 그럼 ‘의사’의 꿈은 어떻게 마음먹게 된 거예요?

    “우선 그때도 의사는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었어요. 막연히 의사가되면 ‘부자가 될 수 있겠구나’ 싶었죠. 

    또 ‘친구와의 약속’도 영향을 줬습니다. 당시 옆집에 절친한 친구가 살고 있었어요. 어느 날부터 그 친구 어머니의 배가 점점 불러오기 시작하더라고. 나중에 알고 보니 난소 안에 있던 물혹 때문이었어요. 결국 친구의 어머니는 수술을 하게 됐고, 수술 당일 친구를 위로해주다가 우연히 시골 병원 창밖에서 수술하는 장면을 보게 됐습니다. 정말 커다란 물혹이었죠. 그 순간 왈칵 눈물이 나더라고요. 친구도 저도 한참을 울었어요. 그때 친구에게 ‘내가 너희 엄마 안 아프게 해줄게’라고 약속했죠. 이 사건을 계기로 의사의 꿈을 더욱 확고히 다짐하게 된 것 같아요”

  • 함기선 한서대 총장. / 한서대 제공.
  • ─ 이후 수도의과대학(지금의 고려대학교)에 합격했죠. 농고에서 의대라니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아요.

    “당시 경쟁률이 30대 1이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의대 진학은 경쟁이 정말 치열했어요. 더군다나 농고 학생이 의대에 진학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죠. 학교에 가보니 친구들이 다들 대단했습니다. 어떤 친구는 의사 집안 출신이었고, 또 어떤 친구는 매우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더라고요. 이런 친구들 사이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공부뿐이었습니다.”

    ─ 대학원에서의 행보도 남다릅니다. 석사 2학기를 마치고 돌연 서울을 떠나 전남 여수로 갔어요. 

    “석사 2학기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말라리아 근절 팀에 지원서를 냈어요. 이후 전남 여수 보건소로 발령받았죠. 그땐 처음 의대에 입학했을 때 마음과 달리 무료했습니다. 무미건조한 일상에서 진찰하고, 환자를 만났던 것 같아요.”

    ─ 애양원(지금의 여수애양병원)은 어떻게 가게 된 거예요?

    “여수에 보건소에서 우연히 여수에 나병 환자들의 집단촌을 알게 됐어요. 당시 ‘스탠리 토플(Stanley Craig Topple, 이하 닥터 토플)’이라는 외국인 의사가 애양원에서 나병 환자들의 치료와 자립을 돕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처음엔 닥터 토플의 기술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그래서 애양원으로 나병 환자들의 수술을 돕게 해달라는 요청을 한 거죠.”

    ─ 애양원에서의 경험, 어땠나요?

    “오랜 시간이 지난 현재까지도 처음 애양원에 도착한 날을 결코 잊을 수가 없어요. 솔직히 처음엔 많이 놀랐죠. 그 누구보다도 나병균이 건강한 피부에 옮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도 참, 사람 마음이 웃기더라고요. 처음엔 환자들과 악수하는 것조차도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친형제처럼 가까워졌죠. 어떻게 가까워지지 않겠어요? 의사를 향한 감사의 마음으로 매일 가슴 품에 새로 낳은 달걀을 넣어오는 따뜻한 사람들인걸요. 친해진 후에는 한 상에서 밥도 같이 먹고, 이야기도 나누며 정말 많은 시간을 함께 웃고 울었습니다.”

    ─ ‘성형외과’를 선택한 것도 애양원에서의 경험 덕분인가요?

    “애양원에서 만난 닥터 토플은 나병을 고치는 것 외에도 모근 이식 시술이나, 굽어진 손가락을 펴주는 등 외형을 정상적으로 회생시켜주는 치료도 하고 있었어요. 그의 헌신적인 사랑에 크게 감명받았죠. 그 당시 저는 의사로서의 지향점을 잃고, 마음이 흔들리는 상황이었어요. 닥터 토플의 모습은 제게 일종의 정신적 충격이었습니다. 이후 저 역시도 굽어진 환자들의 손가락을 펴주고, 눈썹이 없는 그들에게는 눈썹을 선물해주고 싶더라고요.”

    ─ 당시만 하더라도 성형은 꽤 생소한 분야였잖아요.

    “그렇죠. 제가 대한민국 성형외과 의사 1세대에요. 한 때는 하루종일 수술만 해도 밀려드는 환자를 다 받을 수가 없을 정도였죠. 성형 수요는 계속해서 늘어나는데 의사는 턱없이 부족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나중에는 기운을 모두 소진해서 수술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 유독 구순구개열 수술, 일명 ‘언청이 수술’에 전념을 다 했습니다. 이유가 있을까요?

    “당시 제가 더 바빴던 건 병원 업무와는 별개로 ‘구순구개열 수술’에 매달렸기 때문이기도 해요. 입술뿐만 아니라 때론 입천장이 갈라져 말도 할 수 없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그런 병을 고쳐주니 환자들은 광명이라도 찾은 듯 기뻐했죠. 외과적인 수술 외에도 언어치료까지 도와주었습니다. 한번은 수술 후 언어치료를 했던 친구들을 모아 부모님, 서울 시장을 초대해 학예회를 했죠. 당시 적십자 강당이 울음바다가 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 학예회를 계기로 국내에 언어치료가 도입됐어요. 저는 이후에도 대한적십자사와 손잡고 ‘언청이 수술사업’을 했죠.

    수술 후 달라진 모습에 기뻐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구순구개열 수술을 그만둘 수가 없더라고요. 전적으로 제가 좋아서 전념했던 활동이었습니다. 이런 활동으로 ‘국제적십자연맹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헨리 데이비슨 상(Henry P Davison Award)’까지 받게 됐고요. 제게는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별명 하나가 있는데요. 그게 바로 ‘언청이의 아버지’라는 별칭입니다.”

  • 한서대. / 한서대 제공.
  • ─ 그럼 교육사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거예요?

    “개업의로 어느정도 돈을 벌게 되면서 또 다른 꿈이 생겼습니다. 어느 날부터 ‘한 사람의 의사는 한정된 몇 사람의 생명만을 구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의 교육자는 수많은 사람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지 않은가’라는 리처드 루벤스타인(Richard Rubenstein)* 박사의 말씀이 자주 떠올랐습니다. 당시 순천향대학교와 인제대학교가 설립되는 과정에 일조하기도 했고,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대학’에 빠져들었던 것 같아요. 대학병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 느꼈던 보람과 재미도 한몫했고요.”

    *리처드 루벤스타인(Richard Rubenstein): 신학자이자, 교육자로 1979년부터 1988년까지 미국 코네티컷주에 위치한 브리지포트대학교(University of Bridgeport)의 총장을 역임했다.

    ─ 그래도 대학설립이라니, 절대 쉽지 않은 결정인데요.

    “그때가 제 나이 마흔일곱이였어요. 한 개인이 대학을 세우려니 정말 막막하더군요. 뭔가 새로운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고 싶었죠. 고민하다가 전국에 있는 모든 대학의 학과를 정리해서 책상 위에 깔아 놓고 직접 하나씩 찬찬히 살펴봤습니다. 그랬더니 ‘항공학과’는 전국에 딱 한 군데 있는 거예요. 그 순간 ‘바로 이거구나’ 싶었죠. 경쟁력이 있겠더라고요. 그렇게 나이 오십에 한서대를 세웠습니다.”

  • 한서대 비행장의 모습. / 한서대 제공.
  • ─ 결국 한서대를 우리나라 최초의 ‘항공 분야 특성화 인증 대학’으로 키워냈어요.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지금은 타 대학에도 항공학과가 있죠. 하지만 비행장이 있는 학교는 우리 한서대뿐입니다. 비행장을 갖는다는 게 법적인 여건이 매우 까다롭거든요. 또 땅뿐만 아니라 하늘의 여건도 살펴야 하죠. 저희는 20년 전 지역사회의 협조를 얻어 태안군 남면에 비행장 설립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말 그대로 행운이었습니다. 덕분에 한서대하면 ‘항공’이 떠오르는 특성화대학교로 거듭날 수 있었어요.”

    ─ 앞으로 한서대의 비전은 무엇인가요? 

    “사실 요즘 대학들의 실상은 암울해요. 학령인구가 줄어들면서 비는 강의실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죠. 그렇다고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 대학만의 차별화된 분야를 가지고 대처해 나가야죠. 제 성향이 그런 것 같아요. 남들처럼 평범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지금 이 순간도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미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죠. 학생들이 찾는 대학이 되기 위해서는 작은 것에서부터 독특하게 디자인을 해나가야 해요. 이런 특성화된 것들을 발견하는 것이 우리 한서대의 과제이자, 곧 우리나라 대학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 그간 다양한 꿈을 꾸고, 또 성취해왔어요.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요.

    “전 세계 유수 대학을 살펴보면, 그 역사가 몇백 년에 달합니다. 한서대학교 역시 이들 대학처럼 400년, 500년 역사가 되려면, 작지만 강하고 독특한 대학이 되어야겠죠. 그런 의미로 한서대학교가 명문대학으로 거듭나기 위한 초석을 다지고, 후대로 넘겨주는 것이 제 유일한 소망입니다.”

  • 함기선 한서대 총장(우)과 한덕희 조선교육문화미디어 대표(좌)의 모습. / 장희주 기자.
  • ─ 끝으로 최근 ‘2024 대한민국 교육대상’ 교육인물 부문을 수상했어요. 소감 부탁드려요. 

    “한서대학교는 세계 항공 관련 대학 중 유일하게 자체 교육용 비행장을 마련해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와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에 등록했습니다. 교육 면에서도 국제항공연맹(FAI)에서 최우수교육기관 인증과 국제항공교육인증위원회(AABI)에서 정회원 자격을 인정받았죠. 더불어 국제항공우주교육기구인 알리칸토(ALICANTO)에서도 정회원 자격을 취득했습니다. 이번 상은 어려운 목표를 향해 꾸준히 노력해왔던 그동안의 공을 알아봐 주시는 것 같아 더욱 뜻깊고, 기쁩니다. 앞으로도 우수한 학생들을 유치하고, 지역과 함께 세계적 대학의 반열로 오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편, 함기선 총장이 수상한 대한민국 교육대상은 우수 교육 브랜드를 발굴하고 알리기 위해 지난 2008년부터 시작됐다. 본래 명칭은 ‘대한민국 교육기업대상’이었으나, 지난 2021년부터 ‘대한민국 교육대상’으로 명칭을 변경해 다양한 교육 인물·단체·기관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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