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영의 논술개런티] 오펜하이머가 보여준 ‘선의 비범성’
입력 2023.08.04 10:00
- 국민 영웅이라는 명예보다 과학자의 도덕과 양심
  •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유니버셜 픽처스.
  • 오펜하이머, 역사상 인류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인 원자폭탄을 개발한 미국의 물리학자다. 미국의 국민 영웅으로 남아 평생의 유명세를 누리며 역사상에 이름을 올렸을 법한 그는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아닌 그 이면에서 각광 받지 못하는 반전의 인생을 산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미국은 세계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폭주를 막기 위해 핵 개발에 착수하고,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짧은 기간인 3년 만에 이를 해낸다. 이때 맨해튼 프로젝트(미국 핵무기 개발 계획)을 이끈 핵심적 인물이 오펜하이머다. 그는 원자폭탄 개발 사업의 수장으로서 미국의 역사 그리고 세계의 역사에 빛나는 기록으로 남기에 충분한 자격조건을 갖추게 됐다. 그러나 그의 성공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로서 윤리 딜레마에 빠진다. 그리고 그 죄책감으로 인해 정신상태가 매우 불안정해진다. 이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독일 나치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도 전체주의 국가 체제 속에서 극악무도한 악에 따르게 된다는 ‘악의 평범성’ 이론의 모델이 된 인물이다.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악의 폄벙성’은 국가의 의도가 악할 때 그 공동체에 속한 개인 역시 이를 따르게 되며, 국가에 대한 충성이라는 미명으로 악의 행위자로 전락해 버리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심지어 이들은 일말의 죄의식도 느끼지 못하고 그저 자신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항변한다. 

    아이히만은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한 행동에 대해 국가의 명령에 따라 그 어떤 의도도 없이 저지른 것이기 때문에 무죄라고 주장했다. 결국, 그는 사형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반성 없이 “독일 만세”를 외치고 죽는다.

    반면, 오펜하이머는 악의 평범성과 거리가 멀었다. 그가 악의 평범성에 갇히지 않았던 것은 그가 오히려 비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위를 공적 차원에서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변명하는 평범함을 버리고, 자신의 행위가 가져온 결과를 자각하고 이에 책임을 가지는 비판적 자유 의식을 가진 비범한 인간으로 남은 것이다. 그야말로 ‘선의 비범함’을 보여준 셈이다.

    이렇게 원자폭탄의 투하가 무고한 민간인들의 생명을 앗아간 것에 대해 비판과 반성 의식을 가지고 있던 오펜하이머는 트루먼 대통령을 찾아가 면담한다. 이때 오펜하이머는 “내 손에 피가 묻어 있다”고 말하며 원폭 희생자들의 죽음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이를 이해하기보다 나약한 울보 과학자라며 비아냥거린다. 그리고 다시는 백악관에 발 들일 생각하지 말라며 오펜하이머를 내친다. “폭탄을 만든 것은 과학자인 당신이지만 이를 투하하기로 결정한 건 정치인인 나다”라는 말과 함께 과학의 가치중립성을 내비치며 오펜하이머의 자괴감을 덜어줄 근거를 던져주지만, 오펜하이머의 양심은 이와 타협하지 않았다. 

    오펜하이머는 어쩌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통해 미래의 재앙을 미리 머릿속으로 그려봤을 수 있다. 그리고 세상이 재앙으로 치닫는 파국적 결말을 막기 위해 핵확산과 수소 폭탄 개발을 극렬하게 반대하는 입장에 선다. 오펜하이머는 좌절하거나 분노하는 대신 과학적 윤리에 관한 자신의 소신과 신념을 펼쳐 나간다.

    “(원자폭탄 투하 후) 세상이 이전과 같아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됐다. 어떤 사람들은 울었으나 대부분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난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비슈누 왕자가 그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설득하며 그에게 감명을 주기 위해 자신의 여러 팔이 달린 형태를 취하고는 말했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아마 우리 모두 어떤 식으로든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처럼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한 일들에 대해 후회와 비난을 표현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반핵이 반미주의로 인식되던 시절, 오펜하이머의 이러한 행위는 정부의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매카시라는 상원 의원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견고하지 못한 상황에서 탈세 혐의로 정치 생명에 위기를 느낀 그가 재선에 성공할 확률은 현저히 낮았다. 매카시는 이에 대한 돌파구로 “자신에게는 205명의 간첩 명단이 있다”며 사람들에게 적색공포를 주입 시킨다. 오펜하이머는 이러한 매카시즘의 희생자가 됐다. 평소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물리학자 ‘스트라우스’가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공직에서 끌어내렸다. 

    인류 최초로 원자폭탄을 개발했지만, 이 때문에 과학자의 양심과 윤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오펜하이머. 정부로부터 선택과 부름을 받았지만 이내 외면과 버림을 경험해야 했던 그의 삶은 과학과 윤리, 정치 등의 다양한 부분이 극적으로 얽혀있다. 

    그는 역사를 뒤바꿀 혁신적 과학 기술을 세상에 내놓은 천재적 영웅이었지만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그 권력과 혜택을 누리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업적이 인간의 생명과 인류의 미래에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이를 경계하며 패해가 현실이 되지 않도록 끝까지 노력했다. 

    과학이 아무리 객관적이라 할지라도 과학은 그 쓰임새에 따라 상대화되고 주관화될 수 있다. 이에 대한 고려를 과학자가 해야 하는가, 아니면 개발하고 난 뒤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줘야 하는가. 이 고민의 답은 오펜하이머의 선택과 결정에서 찾을 수 있다. 

    ◇ 생각해볼 문제

    1. ‘선의 비범성’은 ‘악의 평범성’과 어떻게 다른지 차이점을 쓰고 이에 해당하는 인물을 찾아 제시해보자.

    2. 핵폭탄과 수소폭탄 같은 대량 살상 무기의 개발이 필요한지에 대한 의견을 서술하시오.

    3. 과연 우리는 오펜하이머를 ‘죽음의 신, 세상의 파괴자’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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