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평생 성적 초등학교 4학년 때 결정된다!’라는 제목의 베스트셀러가 장안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어떻게 보면 약간 과장된 표현의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한국 교육현실을 정확하게 어느 정도는 반영하고 있는 문구가 아닌가 생각된다. 초등학교 입학 후 1~2학년 기간 동안에는 교과 과목 구분이 애매한 통합적인 기초 학습을 경험하게 되고, 교과 성취도를 평가하는 성적은 수치로 명확하게 주어지지도 않고, 별 의미도 없다. 하지만 3학년부터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일제고사에 의한 학력평가와 매 달 학교 안에서 실시되는 교과평가를 근거로 해서 상대적으로 산출되는 등수는 학생들에게 상당한 압박감이 된다.
학교성적은 단순하게 현재의 실력이나 그저 교과성적의 평가 정도를 벗어나서 학생 개개인에 심리적 영향을 끼치는 객관적인 자기 평가의 근거를 주기도 한다. 성적에 따라서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갖기도 하고, 혹은 스스로에 대해 실망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평가절하하곤 한다. 물론 초등학교 3학년 때 부여 받은 성적이 그 학생이 가진 능력의 정확한 객관적인 척도가 될 수 있다고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성적에서의 등수가 그 학생에게 자신이 속한 학교라는 작은 사회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와 자존감의 정도를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자존감의 유무가 앞으로 어린 학생의 학습과 우리가 계속 말하고 있는 영재성의 발현에 어떤 긍정적 혹은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인가를 예측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다. 이런 이유로 지능지수가 매우 높아서 영재로서의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어린 학생들이 학교 생활과 교과학습과정에서 점점 도태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경우도 그리 발견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금은 미국의 버클리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있는 필자가 가르쳤던 학생의 경우를 한번 살펴보려고 한다. 이 학생을 처음 만난 것은 이 학생이 초등학교 6학년이었을 때로 경험한다. 과학을 이해하는 속도나 응용하는 능력을 보면, 지능지수도 매우 높고, 문제해결에도 매우 뛰어난 학생이었다. 그런데 과제집착력은 그렇게 커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초등학교 6학년 남학생들이 그렇듯이, 잠시도 몸을 가만히 두질 못했고, 상대적으로 큰 몸으로 학원 복도와 강의실에서 뛰어다니고 몸싸움을 하고, 공부하러 온 학원에서도 수업시간 50분 이상을 한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무리스럽게 보였다. 우리 학원에 공부하러 오는 학생들은 대부분 과학고등학교를 진학하기 위한 목표를 가지고 온다. 학교 성적도 전교에서 1~10등 정도 안을 유지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 학생의 경우엔, 위에서 언급한 사실에 비추어 추측이 가능하겠지만, 과학고에 진학할 교과 내신성적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다.
과학은 우리 학원에서 최고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다른 아이들처럼 자신 있어 보이진 않고 조금은 위축되어 보였다. 이런 약간의 소심함에서 비롯되는 피상적으로 보이는 조숙함은 학년이 올라가면서 더해갔다. 자신이 학원에서는 인정 받고 있고, 그리고 과학에서는 자신감이 또 생기면서, 학교수업보다는 학원 수업에 더 열심을 내어 갔다. 결과는 전국 과학경시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하고, 교과성적이 상대적으로 좋지 않음에도, 이 수상경력이 도움이 되어, 서울에 있는 최고의 과학고등학교에 진학을 할 수 있었다.
서울 곳곳의 수재들이 집결한 과학고에서의 교과성적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과학고등학교 진학 후의 교과 내신 상대등수가 중학교 때의 내신 등수보다 훨씬 더 높은 진기한 현상이 이 학생에게서 일어났다. 성적이라는 것은 어차피 등수로 평가되는 상대평가이다. 그런데도 평준화 학교였던 중학교 등수보다 서울지역의 전교1등 수준만을 모아 놓은 과학고등학교에서의 등수가 모든 과목에서 훨씬 더 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수학/과학이라면 서울시에서 제일 자신 있다는 우수한 학생들이 모인 학교이었음에도, 자신은 과학에 대해선 전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자신감이 다른 교과에 대한 학습동기도 함께 불러 일으켜 준 것이다. 문제는 결국 자신감과 자긍심이었던 것이다. 중학교 시절 과학고 준비에 별도의 시간을 내지 못했던 영어 성적까지 최고의 수준을 유지하면서 과학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고, 이 학생은 뛰어난 영어 실력에 힘입어 국가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아 바로 미국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고, 현재는 미국 버클리 대학의 응용물리 학부과정을 우수하게 이수하고 있다.
과학고등학교 진학 후의 놀라운 성적 변화가 이 학생이 스스로 품고 있던 재능과 영재성이 달라져서가 아니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결국은 자신감의 문제가 전혀 다른 결과를 불러 온 것이고, 이 학생이 스스로 가지고 있었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고 키워나갈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흔히들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은 남긴 위인들의 예를 들면서, 성취도 낮은 교과성적을 변호하고 합리화하는 경우들이 있다. 이런 사례로 가장 쉽게 드는 경우가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수상 윈스턴 쳐칠과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이다. 쳐칠이나 아인슈타인이 학교교육을 받던 당시의 권위적이고 군국주의적이었던 교육풍토에 대한 언급이나 고찰은 이런 합리화에서 빠져 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이 후의 과정에서 불리한 자신의 조건을 극복하고 자신의 업적을 이루기까지 더욱 더 얼마나 큰 각고의 노력을 성적이 좋았던 다른 학생들보다 몇 배로 기울여야 했었는지에 대한 고찰도 실종되어 있은 채, 피상적으로 영재는 성적이 안 좋을 수도 있는 예로서 쉽게 언급되곤 한다.
모든 영재성을 가진 학생들이 교과성적에서 뛰어난 결과를 보여준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영재들은 교과성적이 뛰어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고,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초등학교 3학년 시절에 처음 받아 들었던 성적표는 단순하게 현재의 교과내용에 대한 실력만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이 아이가 한국의 교육현실에서 얼마나 적응하고 있고, 얼마나 잘 적응해 갈 수 있는지 가능성을 이야기해 준다. 이 뿐만 아니라, 이 학생이 앞으로 어느 정도까지 자신의 영재성을 펼칠 수 있을까 하는 가능성에 대한 심리적인 동기부여도 함께 한다. 초등학교 때 받은 성적이 인생의 성적까지 과연 결정할 수 있는 지를 모르겠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소홀함은 아이가 가진 영재성을 꽃 피울 기회도 없이 스스로 시들게 만들 수 있는 잘못된 습관을 안겨줄 여지가 충분하다.
우리 아이가 가진 영재성을 마음껏 꽃피우려한다면, 아이 입장에서 자긍심을 가지고 소홀함이 없이 교과학습의 결과에서 시작부터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길을 함께 모색해 줄 필요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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