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상의 입시 속 의미 찾기] 왜 우리는 도깨비에 열광했는가?
입력 2017.01.23 10:06
  • tvN 제공
  • 안녕하세요, 신진상입니다. 도깨비가 케이블 TV 드라마로는 유례없는 시청률 20%를 돌파하며 지난 토요일 막을 내렸습니다. 주변에 드라마 팬들을 보면 도깨비파와 김사부파로 나뉘는 것 같은데, 저는 확실히 김사부파인지라 사실 처음부터 제대로 본 건 14~16회 정도였습니다. 저희 집사람과 딸은 도깨비파이면서 동시에 김사부파인지라 1회부터 16회까지 죽 보았더라고요.

    드라마는 허구의 세계고 모든 드라마에 판타지의 요소가 있지만 있음직한 세계를 구현하느냐 전혀 비현실적인 세계를 구현하느냐는 문제는 작가의 성향 집필 의도에 달린 것 같습니다. 김사부가 전자라면 도깨비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전생이니 신이니 삼신할미니 저승사자니 도깨비니 눈에 귀신이 보이느니 다 비현실적인 설정들인지라 현실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죠. 가르치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다보니 의료 공공성과 의료 민영화라는 큰 사회적 이슈를 던진 김사부가 더 교육적으로 의미 있다고 생각했기에 의도적으로 도깨비를 멀리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주말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집중해서 보다 보니 도깨비 또한 교육적 의미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팬들은 도깨비가 말도 안 되는 설정, 비현실적인 사랑 이야기라는 걸 몰라서 좋아했을까요? 아니죠. 알고도 좋아한 겁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죠. 저는 그 이유를 교육적으로 분석해보고자 합니다.

    1) 승자 독식 사회에서 패자부활전이 그립다?


    도깨비는 윤회 전생을 인정하는 동양적 불교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생이 성립하려면 먼저 영혼의 존재가 증명되어야 합니다. 비물질로서의 영혼이 있다는 근거는 갈수록 희박해지고 있죠. 그렇다고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 할 수도 없습니다. 불가지론 혹은 모른다는 말이 가장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요?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존재를 믿고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또 한 가지 전생은 업 소위 카르마라고 불리는 인과 관계의 사슬을 삶의 시작 이전부터 설정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내가 현생에서 고생을 하거나 아니면 부자 부모를 만나 축복을 누리거나 이런 것들이 선천적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의 입장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죠. 영혼처럼 카르마 역시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여부는 아무도 말할 수 없습니다. 역시 모른다가 정답입니다. 그러나...

    업과 영혼 전생을 인정하는 삶이 현재의 삶, 이승의 삶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 걸까요? 저는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그 궁금증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긍정적 영향일까요, 부정적 영향일까요?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말고 다음에 또 다른 생이 있다면, 현생에 대한 절실함이 떨어지지 않을까요? 드라마처럼 29살에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어도 똑 같은 모습으로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 다시 태어나 정해진 운명적 사랑과 못 다한 사랑을 이룰 수 있다면 굳이 이번 생에 애면글면 아웅다웅 살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모름지기 인생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더 이상 기회는 없다라고 살아야 이루고자 하는 것의 반에 반이라도 이룰 수 있지 않을까요? 

    논어에서 공자님이 죽음에 대해서 질문을 받자(실제 논어는 안연 등 수많은 제자들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 나옵니다) 삶도 모르는데 내가 어찌 죽음을 말할 수 있겠느냐고 하신 공자님의 말씀이 저는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바람직한 자세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시대로부터 900년이 지난 21세기 초반 ‘앞으로 한 번 더 혹은 몇 번의 삶을 더 살 수 있다’고 전제하는 전생 드라마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요? 그만큼 현재 우리 사회가 승자독식사회 금수저 흙수저 사회로 양극화 고착화되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비현실적 전생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아니라 희망과 기대로 받아들이는 이면에는 사람들이 그만큼 현세에 패배감 절망감을 많이 느끼고 있다는 뜻 아닐까요? 패자부활전이 사라진 사회, 이미 모든 것이 태어날 때, 어떤 부모를 만나냐에 따라 결정되어 버린 사회에서 더 이상 자신의 노력과 의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자포자기 의식이 엿보여서 씁쓸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 윤회 전생과 함께 카르마가 있다면 이번 삶에서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된다는 무서운 진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음 삶에 보다 나은 조건에서 보다 출발하기 위해서는 이번 생에서 더욱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거죠. 윤회 전생을 카르마로 엮은 불교는 윤회 전생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의 차별을 인정하고 사람들이 현세에 게을러질 수 있도록 만든다는 비판에 대한 반론을 준비해놓은 것이지요. 불교는 논리적으로 꽤나 정치한 종교입니다.   
       
    2) 기억, 유전자, 인간의 자유의지 그리고 사랑

    윤회 전생을 인정하다보면 이런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왜 사람들은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왜 꼭 리셋을 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하는지 신의 뜻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궁금증이 들 수 있죠. 15회에서 가장 슬펐던 장면은 사랑하는 연인을 기억하지 못하는 여주인공 지은탁(김고은 분)이었습니다. 사랑에 대한 기억을 잃는다는 것 만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잔인한 형벌이 또 어디 있을까요?

    그 이유는 드라마에서 여러 번 나왔지요. 망각을 통해 인간을 덜 고통스럽게 하려는 신의 배려라고 합니다. 전생의 기억들을 안고 살면, 전생에서 슬펐던 일 특히 죽음의 고통까지, 얼마나 힘들고 괴롭겠습니까? 안 그래도 현생의 삶도 괴로움과 고통의 연속인데 전생의 고통까지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면 머리가 폭발할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이런 궁금증이 여전히 남습니다. 신은 연인과의 행복한 순간처럼 좋은 기억들마저 왜 망각을 하도록 인간에게 프로그래밍했을까요? 만약에 신이 있다면 이 질문에 이런 답을 준비하고 있지 않을까요?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전생에 대한 기억을 갖고 사는 것은 현세의 삶에 집중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는다. 현세에는 현세의 삶과 인연에 충실해라. 그게 인간의 임무다.”

    그러나 드라마를 보면 전생에 연인들이 이승에서도 연인이 되는 방향으로 인연이 전개됩니다.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 역시 비슷하게 전개되는데요, 사실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면 인연과 관계도 리셋되는 게 맞습니다. 전생에 부부가 현세에도 또 부부가 되고 다음 생에도 부부가 된다면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 어떨 것 같으세요? 행복하실 수 있으세요? 

    또 한 가지 문제는 유전자와 업의 갈등입니다. 유전자는 부모님에게서 물려받고 업은 전생의 나로부터 물려받습니다. 전생의 부모님이 내 현생의 부모님이 아니라면, 당연히 DNA와 카르마는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싸움을 좋아하는 호전적인 유전자를 타고났는데 내 전생의 카르마 때문에 전혀 호전성을 드러내지 않거나 싸움에 대해서 혐오감을 드러낼 수도 있겠지요. 생명과학을 전공하신 분들은 이는 불가능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 분들은 유전자의 발현을 막거나 유발하는 것은 오직 환경과 개체의 상호작용,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뿐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드라마 도깨비에서도 신이 수시로 등장해 사람의 몸을 빌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마다 나비가 그래픽 처리가 되더군요. 육성재 등에게 빙의된 신이 한 말 중 가장 유명한 말이 “신은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운명을 통해 질문을 던진다. 답은 인간들이 찾는 것”이라는 말이죠.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한다는 이야기죠. 이때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대립이라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드라마 최종회를 보면 도깨비의 신부 지은탁이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를 지켜보던 저승사자 왕유(이동욱 분)는 인간의 희생은 신도 예측할 수 없다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신이 인간의 희생을 예측할 수 없다는 건 적어도 신이 전지는 아니라는 증거가 되겠지요. 이론적으로 전지가 아니면 전능일 수도 없습니다. 모르는 게 있는데 어떻게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전지와 전능은 모순되는 개념입니다. 전지는 미래까지 포함해서 모르는 게 없단 이야기죠. 이미 미래는 결정되어 있는 겁니다. 하지만 전능은 그런 미래를 바꿀 수도 있어야 합니다. 미래를 바꿀 수 있다면 이 말은 전지가 안 되는 거죠. 그러고 보면 전지전능한 신은 인간이 만든 관념일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디. 부족하고 불완전한 인간이 관념적으로 생각해 낸 완벽한 존재가 바로 신 아닐까요?

    마지막 회에서 도깨비 김신(공유 분)이 한 말 “누구의 인생에나 한번쯤은 신이 머물던 순간이 있다”는 말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명 대사였습니다. 인간은 한 번쯤은 신처럼 완벽해질 수 있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그 순간은 사랑의 순간이죠. 진정한 사랑을 만나 영혼의 합일을 느끼는 순간 인간은 신이 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동욱과 유인나(극 중 김신의 여동생 김선), 공유와 김고은의 사랑이 바로 그 사례죠. 그런 면에서 사랑은 현실 속 불완전체인 인간이 관념 속 완전체(신)를 꿈꾸며 살다가 일시적으로나마 실제 완전체가 되어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아닐까요? 결국 영원한 사랑은 영원히 아름답다는 것. 작가는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 ※에듀포스트에 실린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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