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우리 어른들도 인생을 사는 목적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 봉착할 때가 있다. 그래서 때로 삶의 목적이 불분명해지면 인생의 시계(視界)가 흐려지면서 일상이 흔들릴 수도 있다.
자라나는 아이들이나 청소년에게 삶의 목적과 관련한 문제는 더 중요하다. 삶의 목표가 잘 세워지지 않거나 흐려지면 모든 현실적인 일이나 일상이 와 닿지 않는 시 구절처럼 어렵고 대응하기 힘든 일이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나 역시 청소년 상담을 하다보면 목표가 없고, 그래서 삶이 흔들리는 아이들의 사례를 자주 접하게 된다.
장 피아제의 제자이자, 현대 발달심리학계를 이끌고 있는 석학 윌리엄 데이먼은 이런 면에서 현대의 젊은이들을 진심으로 걱정한다. 그는 현대의 젊은이들에게서 공통되게 발견되는 현상이 목적의 상실, 꿈의 부재라고 진단한다. 현대사회가 청춘들에게 단지 바쁘게 사는 관성만을 알려주고, 바쁘게 살아야 하는 가치와 이유에 대해서는 잘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 금세기 들어 교육의 좌표나 위상이 뒤틀리고 말았다는 증거라고 비판한다.
루카치라는 학자는 별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행복해지기 힘든 운명에 놓였다고 토로한 바 있다. 인간을 옥죄던 신성(神聖)이나 거대서사들이 사라진 것이 일견 해방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나, 핵실험 후 방향감각을 읽은 비키니섬의 거북이처럼 이정표를 정할 가치마저 더불어 놓쳐버린 현상을 지적하는 통찰일 것이다.
우리 아이들 역시 현대사회의 메가톤급 정보홍수에서 갈피를 잃기는 마찬가지이다. 요즘 아이들은 너무 박학다식하다. 아는 것이 많고, 해야 할 것도 많으며, 걱정스러운 일도 급증했다. 반면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이 접하는 숱한 지식부스러기더미 속에서는 소중한 가치와 의미도 작은 티끌처럼 왜소해지기 쉽다.
수많은 상품과 광고들에 휩싸인 아이들은 소중한 가치와 의미를 몰라서가 아니라, 다른 수많은 사태와 사건들에서 길을 잃어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 말하기 힘들어한다.
“선생님, 행복, 사랑, 정의 그런 거 다 좋은데요. 요즘 아이들이 안 좋아해요. 밤늦게 놀고, 술에 취하고, 여자랑 놀고, 오토바이 타고 그게 재밌거든요.”
내가 다양한 가치와 의미들에 대해 한참을 설명한 뒤 형진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가출문제 때문에 상담을 받는, 중학교 3학년 형진이는 나와 도덕성 발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너도 똑같이 생각하니?”
“똑같이 생각하는 건 아닌데요. 게네들이랑 놀려면 그것밖에 안 통해요.”
“다른 아이들은 어떤데? 가령 좀 착실한 아이들……”
“범생들요. 걔네들이 더 꼴통이에요. 더 명품 좋아하고 뒷담화 심하고, 인간성이 더 더러워요.”
그리고 그들의 이중적인 행동에 대한 몇 가지 사례를 들었다.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내 말들이 외눈박이 세상에서 두 눈을 가지고 똑바로 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형진이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알고는 있으나 그런 가치나 목표를 설정하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도대체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
“우리 학교 전교 1등이 그러는데요. 나중에 자기도 돈 많이 벌어서 요트 사서 여자들 비키니 입혀놓고 태워서 놀 거라고 하던데요.”
공부도 그래서 죽도록 한단다. 형진이에게는 그것이 현실이었다. 물론 형진이 생각처럼 세상 모든 아이들이 이런 부조리한 가치관과 인생관을 갖고서 살아가진 않는다. 선량한 사회인으로 잘 성장하는 아이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이 점점 팽배하고 있는 것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선량한 가치와 건강한 목적의식을 가진 아이들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예전 상담했던, 거짓말을 무척 싫어하는 중1 현서는 반에서 조직적인 왕따를 겪으며 불안장애와 경미한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온 현서는 그 일이 생기기 전에는 친구 사귀기와 책 읽기를 좋아하고, 여느 보통 아이들과 다름없이 밝고 쾌활한 아이였다.
왕따의 이유는 아무리 듣고 생각해도 황당한 것이었다. 어쩌면 현서는 요즘 아이들이 싫어할 만한 아이였다. 우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선생님이나 부모님과 상의하는 아이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탓도 있지만, 엄마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그 나이 때 다 입고 다니는, 비싼 외제 아웃도어 점퍼를 입고 다니지 않았다.
현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거짓말과 욕이었다. 함부로 선생님 욕을 일삼는 아이들이나 친구들에게 험한 말을 함부로 하는 또래 아이들을 이해하기 힘들어했다.
어느 날 선생님 앞에서는 온갖 아양을 떨면서도 아이들 앞에서는 앞장서서 선생님 뒷담화와 욕을 하면서 여왕벌노릇을 하는 한 여자 아이와 마찰이 생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그 여자 아이의 비상식적이고 무리한 부탁이었다. 현서에게 수련회 가서 잘 방을 바꿔달라고 한 것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친구들과 지내야 하고, 선생님들이 있는 층에서는 맘껏 제대로 놀 수가 없으니 자신이 현서의 방에서 자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방의 인원수는 제한되어 있었다. 이미 친한 친구와 같은 방을 쓰게 되어 기뻐하고 있던 현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부탁이었다. 전에도 그 여자 아이의 무리한 부탁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대개는 현서가 참으며 부탁을 들어주는 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현서는 거절했고, 그 이후 조직적인 왕따가 이루어졌다. 왕따를 시키는 험담 가운데는 싸구려 옷을 입고 다니면서, 선생님과 너무 친하게 지낸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런데 사실 나중에 더 큰 후폭풍이 날아간 것은 현서보다는 왕따를 주동한 그 여자 아이였다. 학교징계위원회에 회부되면서 그 여자 아이가 그간 저지른 악행들이 속속 밝혀졌기 때문이다. 사건의 전모가 백일하에 드러나자 그 여자 아이는 매일 학생부실에서 몇 백 장의 반성문을 써야 했고, 부모들을 사흘이 멀다 하고 학교에 불러왔으며, 심지어는 강제 전학 권고까지 받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왕따 사례들을 빈번하게 접하는 나로서는 항상 부모 상담에서 조심스럽고 안타까움을 느낀다. 물이 엎질러지고 나면 수습이 참으로 어려운 것이 왕따 문제이다. 그래서 부모들과 자주 왕따에 임하는 부모의 자세를 일러준다. 첫 번째 원칙은 ‘왕따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최선의 방어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해결책일 수는 없다.
우리 아이들 모두의 심성이 좀 더 밝고 순수해지지 않는 이상 이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은 미봉책일 수밖에 없다.
윌리엄 데이먼은 이슬람의, 자살테러를 저지른 소년들을 예로 들며 때로는 위험한 목적의식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위험한 목적의식은 어른들에 의해, 사회에 의해, 잘못된 이념들에 의해 아이들에게 전염되며, 이로 인해 아이들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무모한 행동에 이르기도 한다고 말한다.
아이들에게 선량한 목적의식, 가치 있는 목적의식을 심어주어야 하는 이유 역시 잘못된 목적의식이 아이들로 하여금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이나 심리로 이끌기 때문이다.
때로는 목표상실이 문제가 아니라 위험한 목적의식이 더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젊은이들을 쉽게 물들이는 물질주의적인 가치관, 이기적이고 반사회적인 가치관은 가장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요소이다.
예전 서른 살에 가까워지는, 전형적인 캥거루족 젊은이 한 명과 상담한 적이 있다. 이미 우울증이 깊어져 온당한 생각과 현명한 판단이 어려워진 상태이긴 했으나, 그 젊은이의 입에서는 부모들이라면 누구나 가장 우려스러워할 이야기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내용의 골자는 이런 것들이었다.
‘나를 이 꼴로 만든 것이 부모이다’, ‘그러니 모든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 ‘자신이 죽을 때까지 평생 먹여 살려야 한다’, ‘나는 부모에게 내가 원하는 것들을 요구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 ‘부모에게는 내가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사줄 의무가 있다’ 등이었다.
자녀가 인생의 목표와 꿈을 가지고 성실하게 자라도록 이끌지 못한 데는 분명 부모의 잘못이 클 것이다. 그 청년의 부모는 때늦은 후회로 눈물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자식들 키우는 몇 배의 노력과 투자를 하고서도 이런 참담한 결과에 이르자 그 젊은이의 부모는 참담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고 고백했다.
자녀에게 건강한 목적의식이 필요하다. 건전한 소망과 꿈이 필요하며, 구체적인 인생설계와 직업탐색이 필요하다. 내 아이가 자칫 눈을 가린 경주마처럼 멀리 보지 않고 달렸다가는 넘어져 일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현명한 부모라면 아이에게 높이 나는 갈매기처럼 멀리 볼 수 있는 지혜를 일러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갈매기가 향하는 곳은 멋지고, 아름다고, 가치 있는 세계여야 할 것이다.헬로스마일 소아청소년 심리센터 원장 / 퇴계문학치유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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